작고 시인의 시

김상미_ 2년 남짓, 시처럼 살다 가다/ 익명의 사랑: 이연주

검지 정숙자 2015. 12. 26. 00:38

 

 

  『유심』2015-12월호 <송년기획/ 겨울밤, 요절 시인을 읽다>에서

 

 

    익명의 사랑

    -위험한 시절의 진료실 1

 

    이연주 (1953~1992. 향년 39세)

 

 

  정말 꽃이 되고 싶어, 또는 구름

  아홉 배는 내가 더 당신을 사랑할 걸- 그런 꽃.

  새털 옷을 입고

  당신 고향 가는 길 앞질러 따라가는

  그런 구름.

 

  석간신문이 배달됐지만 의미가 없네.

  죽은 고양이도 쥐떼들의 혼령도

  이제 더는 문간 근처를 얼쩡거릴 수가 없어.

  꽃의 사랑, 혹은 구름.

 

  정부 쪽에선 비밀에 부치겠지?

  군중심리란 게

  사랑에 오염된다면 전략은 힘들어지기 마련이니까.

  그러나 공기는 느끼지.

  바람은 느끼고말고.

 

  내가 당신, 하며

  꽃가루를 공중에 뿌려주면 공기들은 명랑해질 거네.

  새털 옷은 하늘을 얼마나 기쁘게 할까.

  사랑인데.

 

 

  2년 남짓, 시처럼 살다 가다_ 김상미

  이연주 시인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매우 조심스럽고 매우 난감하다. 특히 그녀의 연대기적 이력과 죽음에 관한 이야기는 더욱더. 왜냐면 전혀 아는 것도 알려진 것도 없기 때문이다. 1953년 군산에서 태어나 1991년 가을, 시인이 되기까지의 그녀의 정확한 행보를 아는 사람을 나는 아직까지 한 사람도 만나보지 못했으니까.

  그녀와 필자는 같은 문예지 『작가세계』(필자는 제1회, 1990년 여름호, 그녀는 제3회, 1991년 가을호)로 등단한 관계로 남달리 친하게 잘 지냈지만 나와 달리 그녀는 자신에 관한 사적인 이야기는 거의 하지 않았다. 한동안 독일 파견 간호사로 근무하다 돌아와 의정부 기지촌의 매음 여성들을 치료하는 수간호사로 일했으며 1985년에 결성된 방송통신대학교 '풀발' 동인으로 활동해왔다는 것과 1990년 4월 『월간문학』으로 이미 등단한 적이 있었다는 것 외엔. 어쩌다 내가 궁금해 슬쩍 물어보면 문학 이야기만 하자고, 자신은 과거가 없다고 했다.

  하지만 나는 그녀가 조금씩 걱정되기 시작했다. 그녀는 자신이 겪은 매음 여성들의 삶에 너무 깊이 함몰되어 있었다. 그 여성들의 말할 수 없이 너덜너덜해진 삶들이 그녀 가슴에 너무나 큰 구멍을 만들어 놓아 그녀가 그들과 자신을 동일시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자신의 삶조차도 그 구멍 속으로 자꾸만 밀어넣고 있는 건 아닌지 위태위태해 보였다.그걸 그녀도 안다고 했다. 그 구멍을 메우고 싶어, 아니 지우고 싶어, 아니 통째로 끌어안고 싶어, 그래서 문학을 선택했다고. 그래서 미치도록 쓰고 또 써야 한다고.

  정말 그랬다. 그녀는 무언가에 쫓기는 시(詩)강박증 환자처럼 아니, 시에 목숨 건 사람처럼 쓰고 고치고 또 쓰고 고치면서 등단한 지 몇 개월만에 첫 시집 『매음녀가 있는 밤의 시장』(세계사.1991.11.>을 세상에 내놓았다. 그녀의 첫 시집은 그 처절한 잔혹감과 끔찍함으로 인간존재에 대한 우리의 안이하고 단편적인 선입견을 일시에 전복시키고, 철저히 분열되고 파편화된 현대인의 모습을  매음녀들의 비참한 삶과 오버랩시키면서 가부장적· 자본주의적 폭력과 욕망, 위선과 착취, 냉소와 잔혹을 적나라하게 폭로하고 고발하였다. 그리고 1992년 10월 12일, 그녀가 스스로 목숨을 끊을 때까지 또 한 권 분량의 시집 원고를 쓰고 또 썼다.

 

  그녀의 부고를 들었을 때 나는 믿기지가 않았다. 오래 마신 술 때문이었을까? 그녀는 정말 술을 많이 마셨다. 한번 마시면 끝을 봐야 하는 성격이었다. 술 취한 그녀는 괴기스러울 정도로 정열적이고 활기 넘치게 위악적이었다. 그럴 때마다 더 크게 벌어지는 그녀 인생에 난 커다란 상처, 공허감! 문학으로도 채워지지 않는 그 공허감 때문이었을까? 하지만 우리는 그녀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녀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 아는 게 전혀 없다. 그녀는 섬광처럼 우리 앞에 나타나 2년 남짓한 짧은 삶을 그녀의 시처럼 살다 떠났다. 우리에게 남겨진 것은 두 권의 시집 『매음녀가 있는 밤의 시장』과 유고시집인 『속죄양, 유다』(세계사, 1993), 그리고 검은 베일에 꽁꽁 싸인 그녀의 39세라는 젊은 나이의 주검뿐이다.

 

 

  * 김상미/ 1990년 『작가세계』로 등단. 시집『모자는 인간을 만든다』『검은, 소나기 떼』『잡히지 않는 나비』. 박인환문학상 수상, 시와표현 작품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