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표현』2015-11월호 <권두시론> 혜산 박두진 탄생 100년을 맞이하며_(발췌)
해
박두진(1916~1998)
해야 솟아라. 해야 솟아라. 말갛게 씻은 얼굴 고운 해야 솟
아라. 산 너머 산 너머서 어둠을 살라먹고, 산 너머서 밤새도
록 어둠을 살라먹고, 이글이글 애띤 얼굴 고운 해야 솟아라.
달밤이 싫어, 달밤이 싫어, 눈물 같은 골짜기에 달밤이 싫
어, 아무도 없는 뜰에 달밤이 나는 싫어……
해야, 고운 해야. 늬가 오면 늬가사 오면, 나는 나는 청산이
좋아라. 훨훨훨 깃을 치는 청산이 좋아라. 청산이 있으면 홀
로래도 좋아라.
사슴을 따라, 사슴을 따라, 양지로 양지로 사슴을 따라 사
슴을 만나면 사슴과 놀고,
칡범을 따라 칡범을 따라 칡범을 만나면 칡범과 놀고……
해야, 고운 해야. 해야 솟아라. 꿈이 아니래도 너를 만나
면, 꽃도 새도 짐승도 한자리 앉아, 워어이 워어이 모두 불러
한자리 앉아 애띠고 고운 날을 누려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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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활달하고 이채로운 시편을 두고 평론가 조연현은 "박두진은 「해」이 한 편으로써 유언 없이 죽을 수 있는 인간이 되어버렸는지도 모른다."라고 하였다. 그렇게 시집 『해』(1949)는 한국 시사상 유례없이 밝고 희망적인 노래로 가득 차 있었다. 특히 「해」의 마지막 연은 질곡의 역사를 이겨낸 지상의 유토피아를 열망하는 선생의 의식이 강하게 착색된 대목이다. 환희의 감정을 제어할 수 없어 선생의 시편에는 호격과 쉼표, 생략 부호가 빈번히 등장하는데, 감동을 절제하지 않고 발산하는 그 특유의 유장한 산문시의 리듬은 풍요로운 자연의 이미지, 독창적 상징어들과 어울려 건강하고 활력에 넘치는 세계를 보여주었다. 이러한 선생의 향일성(向日性) 충동은, 원래 '빛'이라는 것이 밝고 힘찬 생명력과 남성적 수직 상승의 상징으로 쓰이고 있음을 고려할 때, 초기 시편의 '산'과 마찬가지로 현실 극복의 구체적 매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마치 '물'이 부드럽고 여성적인 수직 하강의 이미지를 띠는 것에 비해 '빛'이나 '산'의 우뚝한 이미지는 선생 시편의 가장 강건하면서도 초월 지향적인 이미지를 구축하고 있는 것이다.
* 유성호/ 1993년 《서울신문》신춘문예 평론 등단. 저서 『움직이는 기억의 풍경들』외. 현 한양대 국문과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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