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설>
순수와 참여를 봉합하는 시성(詩性)/ 70년대 동인 : 임정남
- 이경철 (시인, 문학평론가)
저것이 문명인가
임정남
무서운 밤이 항상 나의 방에 있다
매일 자살하는 나의 머리가
그 밤을 믿으려 한다
밤은 내 생애에 대한 미래이다
누구의 방문도 거부하는 내 손바닥에
예술의 술잔은 오랫동안 비어 있고
죽은 책이랑 비틀거리는 야수들이
싸움이 싫은 나의 싸움을 비겁하게 만든다
그것은 운명이고 우리들의 가련한 개인
무서운 밤이 항상 방을 뛰쳐나가려 한다
더러운 도시를 정복하려 한다
비겁한 기억의 잠든 폐허
나는 유리창과 방문과 밤의 옷자락을 꼭 잡고 있다
아 그런데 저것은 누구의 실수인가
두려워하던 밤의 기적이 도처에서 일어난다
지붕 위에서 카시미론 이불 밑에서
우리들의 방을 뛰쳐나간 밤이 지배되고 있다
누군가의 평생토록 긴 밤이
이미 을지로와 나의 심장에 가득 차고
지배되는 폭풍의 무섭지만 관능적인 키스
집집마다 불이 꺼지고 가로등이 켜진다
저것이 문명인가
-창간호에 발표한 전문-
가쁜 호흡으로 '밤'의 상상력을 펼치고 있는 시이다. 그렇다면 이 시를 지배하고 있는 '밤'은 무엇일까. 일단은 어두운 시대 상황으로 읽히면서도 꼭 그렇지만은 않다. 정반대로 개인의 어둔 방으로 숨어든 혁명의 의도로도 읽힐 수가 있기 때문이다. 독재시대 검열을 피하기 위한 방편일 것인가. 그러면서도 시대의 어둠을 직격하지 못하는 자의식이 "싸움이 싫은 나의 싸움을 비겁하게 만든다/ 그것은 운명이고 우리들의 가련한 개인"이란 대목에서 어쩔 수 없이 뛰쳐나오고 있다.
다시 밤이다
집 없는 밤이다
전깃줄에 칭칭 감긴 외로운 도시가
신경의 하늘 밖으로 사라지고
마침내 새벽에 부딪쳐
흰 나비처럼 부서질 때까지
이 싸움 없는 정신의 매일 밤이다
그 개인의 뒤뜰에
죽은 신발들은 소리 없이 내려 쌓이고
바다로 가는 길은 조금씩 파묻히고
스피카를 헤치고 오는
상처받은 자유가
얼마 동안 주머니 속에서
달그락거리다가 죽는다
- 2집에 발표한 장시 「죽은 도시」첫 연-
'밤'의 상상력으로 첫 장을 열고 있으면서도 앞에서 살핀 시보다는 좀 더 구체적이다. "싸움 없는 정신의 매일 밤"이나 "상처받은 자유" 등에서 보다 더 참여시 쪽으로 향하고 있다. 바로 이어지는 연에서 "몇 번이나 뒤집어진 수영(洙暎)의 뜰을 지나서/ 잘 있거라/ 뜨거운 벽돌과 사상의 껍질 속/ 헝클어진 검은 공상(空想)의 누더기들/ 아 잘 있거라" 하는 대목에서는 김수영 시인의 참여시와 시론이 그대로 떠오를 지경이다.
등단하자마자 앞장서 동인을 결성한 임 시인은 이처럼 '밤'의 상상력과 거칠고 긴 호흡과 때로는 과격한 언어의 시로 시대의 어둠을 뚫으려 한 많은 시들을 《70년대》에 꾸준히 발표했다.
나는 밤을 따라간다 오늘 밤
나무들이 줄지어 막고 서서
우수수 우수수
신경질적으로 살을 벗는다
내 손에 닿았던 사랑은 미끄러지고
오 나무처럼
절망은 깊이 흰 뼈를 견뎌내고
죽은 잎사귀들은 홀가분하게
밤을 따라간다 오늘 밤
나와 함께.
-5집에 발표한 시 「오늘 밤」전문-
창간호부터 5집까지 꾸준히 발표한 시 17편 가운데 가장 짧으면서도 호흡이 안정된 시이다. 참여시, 민중시 쪽의 '출정가' 부류로 읽히면서도 참 아름다운 시이다. 이 시를 끝으로 《70년대》도 무기한 정간에 들어갔고 임 시인도 시를 떠나 민주화운동에 투신하다 2005년 시집 한 권도 못 펴내고 타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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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0년대 동인의 시『고래, 2015』에서/ 2015.8.25.<책만드는집>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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