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에서 읽은 시

법관 아재/ 이규원

검지 정숙자 2015. 11. 23. 00:42

 

 

  법관 아재

 

  이규원

 

 

  벌초하러 간 날이 하필 비 온 뒤 갠 날이었다. 긴소매 옷에 장화까지 신고

조심해서 벌초를 했지만 몸을 말리러 나온 뱀을 피할 순 없었다. 발등을 지

나간 놈, 낫날에 걸려 던져진 놈, 풀 벤 자리에서 어정대던 놈 모두 도망가고

내 손등을 물 뻔했던 독사 한 마리 묘 꼭대기에 머리만큼 남은 풀 속에 숨었

다. 예초기를 짊어진 정구 아재가 나를 밀치고 풀을 벤 뒤 똬리 틀고 있는 독

사를 때려잡기 시작했다. 주위 풀숲으로 던져버려도 될 것을 얼굴이 벌겋게

달고 목울대의 핏줄을 세우며 사력을 다해 막대기로 내리쳤다. 묘의 등이 패

이고 잔디가 나부끼고 막대기가 부러지고 뱀의 몸뚱이가 동강 났지만 멈추

지 않았다. 법대를 나와 산속에서 수십 년 동안 사법고시 공부를 했지만 번

번이 낙방하고 결혼 생활에도 실패하고 직장에서도 밀려나고 가족에게도 외

면당한 아재의 판결은 서릿발 같았고 뜯어말릴 때까지 응징은 계속 되었다.

 

 

   *『시에』2015-겨울호 <시에시>에서

   * 이규원/ 부산 출생, 2005년『시평』으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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