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에서 읽은 시

강원랜드 버스 터미널에서/ 황동규

검지 정숙자 2015. 11. 20. 23:28

 

 

    강원랜드 버스 터미널에서

 

     황동규

 

 

  개장 날 강원랜드 입장

  그날까지의 세속 일, 후 불듯 날려버리고

  십 년 넘게 하루하루를 구름 속에 노닐듯 산다는

  한판 잡은 자가 건네주는 개평도 즉석에서 걸어 날린다는

  신선 다된 꾼도 몇 있다지만,

  몰고 온 차 저당 잡힌 돈마저 털리고 셔틀버스에 실려 와

  자욱한 안개비 속에 도망치듯 버스 타고 돌아가는 사람,

  나 마냥 땅거죽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사람.

 

  간밤에 강원랜드에서 머지않은 민박 빌라에서 자며

  이십 년 전인가 두 차례 초대받은

  작가 홍상화와의 환상적인 무창포 별장에서

  바다 쪽을 온통 통유리 몇 장으로 두른 창에

  그냥 보내기 아까운 노을이 와 머무는 것도 뒷전으로 한 채

  포커에 매진하는 꿈을 꾸지 않았던가?

  촉이 팍 찍혀 올인 한 판 어떻게 됐지?

  홍상화가 풀 하우스를 깔며 판을 붙여 쓸어 담았지.

 

  돈이건 친구건 털려봐야 삶의 속을 알게 된다는 말씀

  자욱이 내리는 저 안개비처럼 아스팔트나 적시게 하자.

  지금 이곳처럼 미세한 안개비 알갱이들이

  송곳처럼 인간의 목덜미를 찌르는 곳 어디 있겠는가?

  도박 안 한 것 천만다행이라 흐뭇해하는 좀스런 나는 어떡허지?

  사방에 안개비 가득해 어디 잘 보이는 데 세워둘 수도 없는데.

 

 

  *『시산맥』2015-겨울호 <신작시>에서

  * 황동규/ 1958년『현대문학』으로 등단


'잡지에서 읽은 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수문(水文)/ 김희숙  (0) 2015.11.21
시인의 물건/ 문창갑  (0) 2015.11.20
문방구 소녀/ 원구식  (0) 2015.11.12
잠잠/ 길상호  (0) 2015.11.12
주판 놓는 은사시나무/ 김영  (0) 2015.11.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