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에서 읽은 시

수문(水文)/ 김희숙

검지 정숙자 2015. 11. 21. 21:22

 

 

    수문(水文)

 

    김희

 

 

  한여름, 수문들이 물 팽팽하게 가두고 있는 저수지를 열면 순간의

도로 쏟아져 나가는 물은 구불거리는 한 마리 거대한 뱀처럼 보였다 몸

을 뒤틀며 수로를 따라 흘러가던 뱀. 그 뱀의 속도로 벼들은 파랗게 자라

고 물뱀으로 변한 줄기들이 논두렁을 넘어갔다

 

  물은 흐르는 속도라 여기지만 고여 있는 속도가 더 오래 달린다 수직의

하늘거리는 속도로 누렇게 익은 다음에도 일렁이며 어디론가 또 달린다

 

  물이 오른 줄기는 꽃을 피우고 마른 줄기는 수문이 다 말랐다 그사이,

바짝 마른 줄기가 그 마른 문을 열고 들어와 있다 뜨겁게 달아오른 태양

이 기포를 끓어오르게 하지만 말라가는 수문은 조용하다 마른 것의 속도

는 어떤가 비틀어지는 속도는 또 어떤가 어렸을 때는 쭈그려 앉기만 해도

마렵던 요의처럼 물오른 풀 가지 꺾으면 오를 대로 오른 물의 속도가 순

간, 꺾어지는 속도로 바뀐다

 

  뱀을 만나면 지그재그로 꺾어지며 뛰라던 말, 물을 가득 담고 있는 저

수지는 똬리를 틀고 앉아있는 거대한 뱀처럼 보였었다 쉬쉬 소리를 내며

풀어지고 나면 물은 다 썩고 뼈만 앙상한 물의 똬리가 저수지 안에 죽어

있었다

 

 

  *『시산맥』2015-겨울호 <신작시>에서

  * 김희숙/ 2011년『시와표현』으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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