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오와 유리창
전비담
유리창은 낭떠러지가 되었다
아무리 소리를 질러도 낭떠러지는 달아나지 않는다
비명의 목을 졸라매어 낭떠러지를 없애버리자
정오가 목덜미를 만지며
오후에 늘어뜨린 오렌지색스카프를 감아올린다
시간이 시계바늘 소리처럼 퍼져 있다면
시간을 아무리 정돈해도 시간의 한가운데
눈을 감으면렴 소리가 끊어지는 연인들
흰 어둠이 지나가며 뚫어놓은 정오에
얼굴을 빠트린 꽃들의 몽환
귀기울일 이유가 없어진 목소리들과 두리번댈 이유가 없어진 눈들
졸린 목소리들이 범람하고
얼굴을 잃은 꽃들이 피어난다
중심을 지나서 출구에 이르는 것은
시계바늘의 발자국을 뒤집어쓴 머리카락이
허깨비병을 앓으며 공중을 빠져나가는 일
출구에서도 구출될 수 없다고
탁자 위에서 녹음기가 돌고
같은 음량 같은 음색이 남아돌고
유리창에 들러붙는 핏물 빠진 목소리와 귀 그리고 눈
저곳에 오렌지색스카프를 목에 맨
누가 늘 있다
*『이상』2015-가을호 <신작시>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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