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에서 읽은 시

모습 없이 환한 모습/ 조정권

검지 정숙자 2015. 9. 5. 16:11

 

 

 『대산문화』2015-가을호 <창작의 샘/ 시>에서

 

 

   모습 없이 환한 모습

 

   조정권

 

 

  비 오는 밤

  본 적 있니?

 

  가로등 아래서 노숙하는 비

 

  그 맡바닥에 밤은

  더 큰 허공.

 

  허공의 밑.

  시인은 허공을 건축하는 자.

 

  나의 언어는 허공에서는 아직도 망치와 톱일 뿐,

  내 친구 흰 구름이 아직 모이지 않아요.

 

  허공 속을 아직도 떠돕니다.

 

  보헤미아

  들판 여름하늘 흰 구름 모이면 성당 구조물

 

  흰 구름은 성당.

 

  밤이 되면

  내 손은 허공

 

  무늬 없는 벽돌처럼 쌓아올린 거대한 허공은

  세상의 지친 걸인들을 문 앞에서 한없이 걸어오게 하지요.

  벽 속에 숨겨진 통곡하는 방에 숨어

  한없는 울음을 울 수 있는,

  아무리 울어도 밖으로 들리지 않는 저 밤의 하늘 들판이

  내겐 처녀시가 출혈했던 곳일 거 같다는 생각.

 

  촛불을 켜지 않았어요. 촛불을 들고 있는 언어란

  엄마들의 노인네들의 오랜 습관 언어이기에.

 

  시는 상징이 아니라

  상징의 무덤일 뿐.

 

  비 오는 날이면

  우뚝 우뚝 서서 비맞는

  비를 보아라.

 

  비는 혼자 비를 맞는다.

 

  시는 성당 문 앞에서 가설 텐트를 친 빈자들의 무늬라고 생각했어요

 

  내게 시란 무신론 옆에 친 텐트 같은 것.

 

 

  * 조정권/ 시인. 1949년생, 시집 『비를 바라보는 일곱가지 마음의 형태』『시편』『허심송』『하늘이불』『산정묘지』『신성한 숲』『떠도는 몸들』『먹으로 흰꽃을 그리다』『고요로의 초대』『시냇달』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