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에서 읽은 시

기억에 기대다/ 허진아

검지 정숙자 2015. 9. 5. 15:08

 

 

    기억에 기대다

 

    허진아

 

 

젖은 풍경이 왜 평면적일까? 사선으로 내리는 비를 오래 읽었다.

 

빅 이슈 표지에 아이돌이 스트라이프로 웃고 나는 긁었던 자리를 다시 긁

었다. 열리지 않은 서랍은 조금 열린 채 두기로 했다.

 

진딧물을 잡다 마지막 자몽을 떨어뜨렸다. [서운하다와 홀가분하다 사이에

한참 서 있었다]흰 꽃잎이 그림자로 누워있는 베란다, 아파트에서 잘 자라

는 건 인간뿐이다.

 

손에서 빠지는 컵을 잡지 않았다, 가끔 잘못될 일이 궁금하다.

깨진 것이 더 아름다울 때가 있나보다.

 

어머니 기일을 간단히 지내자는 연락을 만지작거렸다. 간단이란 말이 얼마

나 말랑한지― 죽은 사람이 산 사람을 앞지를 수 없다.

꿈에 보이지 않는 어머니, 지옥이 없는 게 확실하다.

 

계단을 지나 창문을 지나 식탁에 내리는 비, 젖은 밥을 먹고, 청소기를 들

리고, 어제 입었던 옷을 다시 입었다.

 

우수관 역류에 대해 관리소 안내방송이 나오고 덜 마른 수건에서 냄새가 났다.

 

불협화음을 구별하기 힘든 시기다.

 

 

*『예술가』2015-가을호 <예술가 신작시>에서

허진아/ 2010년『유심』으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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