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號) 이야기
김형영
나는 몇 개의 호를 가졌다.
어느 해 스승의 날
미당 선생님께서 내게 호를 하나 지어주셨다.
"자네 고향이 부안이니
그곳의 명산 변산(邊山)으로 하시게.
변두리 산, 거 좋지 않은가."
법정 스님은
평소 내가 얼마나 허약하게 보였는지
"오래 사시라고 수광(壽光)이라 호를 지어 보았소."
불교적이기는 해도 마음에 들어
정민 교수에게 자랑삼아 물었더니
'목숨 수(壽)를 지킬 수(守)로
바꾸면 어떻겠느냐'고 의견을 주었다.
불교와 천주교의 절묘한 일치다.
언젠가 고은 선생께 호를 부탁했더니
한 삼 년쯤 지나서
"여기 호 지었네. 수정(水頂), 거 좋아!"
물이 정상에 있는지는 몰라도
물의 정상에 서라는 뜻인가?
조광호 신부님은
내 세례명이 스테파노니까,
스테파노는 작은 돌에 맞아 죽었으니까
"소석(小石)이 잘 맞지 않느냐" 했고
유안진 시인은 뜬금없이 전화로
"일사(一史)라는 호를 지었는데 받겠느냐"고 물었다.
그리고 2014년 10월
내가 시집 『땅을 여는 꽃들』을 상재했는데
김병익 선생님께서 그걸 읽어보시고
'송연(松然)'이라는 호를 지어 주셨다.
소나무답다니, 너무 황송하고 무엇보다
소나무에게 부끄러워 받아도 될지 모르겠다.
이래저래 나는 호 부자가 된 느낌이다.
이제 나도 나이가 좀 들어
더는 호를 내려줄 분이 안 계실 것 같다
정현종 시인께서 지어준다고 약속은 했지만
아직은 감감 무소식이다.
*『시산맥』2015-여름호 <신작시>에서
* 김형영/ 1966년 『문학춘추』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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