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허만하
나는 드디어 멀리 이 도시를 떠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때 없어지는
것은 내가 아니다. 무수한 도시 가운데의 하나의 도시가 흔적 없이 사라
질 뿐이다.
그렇게 기록을 혐오하며 고요히 멸망한 이름 없는 왕조가 있다. 느닷
없이 쏟아진 한 줄기 소나기에 흠뻑 젖은 길바닥에 고인 물이 잦아들 때
그 안에 잠겨 있던 하늘이 사라지듯, 그렇게 꿈꾸듯 사라진 도시가 있다
당신이 누구에게나 잊혀져 있다면, 당신은 벌써 루란(樓蘭)처럼 사라
지고 없는 것이다.
*『현대시』2015-7월호 <신작특집>에서
* 허만하/ 1957년『문학예술』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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