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에서 읽은 시

역사/ 허만하

검지 정숙자 2015. 7. 8. 01:19

 

 

     역사

     

     허만하

 

 

  나는 드디어 멀리 이 도시를 떠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때 없어지는

것은 내가 아니다. 무수한 도시 가운데의 하나의 도시가 흔적 없이 사라

질 뿐이다.

 

  그렇게 기록을 혐오하며 고요히 멸망한 이름 없는 왕조가 있다. 느닷

없이 쏟아진 한 줄기 소나기에 흠뻑 젖은 길바닥에 고인 물이 잦아들 때

그 안에 잠겨 있던 하늘이 사라지듯, 그렇게 꿈꾸듯 사라진 도시가 있다

 

  당신이 누구에게나 잊혀져 있다면, 당신은 벌써 루란(樓蘭)처럼 사라

지고 없는 것이다.

 

  

  *『현대시』2015-7월호 <신작특집>에서

  * 허만하/ 1957년『문학예술』로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