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에서 읽은 시

표백/ 이장욱

검지 정숙자 2015. 6. 26. 00:23

 

 

      표백

 

      이장욱

 

 

  나는 어딘지 몸의 빛깔이 변했는데

  내가 많이 거무스름하였다. 끌고 다닐 수가 없어서

  잘 표백을 시키고

 

  너무 백색이 된 뒤에는 침묵하였다. 당신이 추측을 했는데

저것은

  그림자에 지나지 않습니다, 아무리 존재해도 허공을 닮을

뿐입니다. 저런 것을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나도 나를 의아해하였다. 있다가 점점 보이지 않는 것이

  모든 것에 흡사하다고.

  그래도 나에게는 많은 것이 떠오르는데 가령

  당신의 키와 면적

  호주머니 속의 빈손

  먼 불행의 접근

  죽은 친구

 

  결국 발바닥이 온몸을 지탱하는 것이다. 발끝은 아니지만

발끝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거울은 아니지만 등을 보여주는

것이다. 골목이 아니지만 막다른 곳에 이르러

한꺼번에 거대해지는 것이다.

 

  밤과 비슷한 것들로서. 소리라든가 공기라든가 시간과 같이

무섭게 스며들어 고요하다가

  뜻밖의 곳에서 확대되는 것들로서.

 

  나는 천천히 표백되었다. 조금씩 모든 것이 되었다. 나는

  나를 끌고 다닐 수가 없어서

 

 

                   *『시인동네』2015-여름호 <시>

                   *  이장욱/ 1994년『현대문학』으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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