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언극(無言劇)처럼
박완호
나무 몇 그루 무언극(無言劇) 대사처럼 서 있었다. 등화관제의 기억에서 걸어 나온 그림자가 새벽 부둣가에 다다르고 있었다. 발화되지 못한 외마디가 밀사(密使)처럼 눈앞을 스쳐 갔다. 바람꼬리에 매달려 가는 소리를 쫓아 나는 말이 보이지 않는 데까지 따라가 보았다. 거기서도 나무 몇 그루는 여전히 무언극 무대의 배경으로 아리게 흔들리고 있었다. 말은, 말이 없는 데서 더 번뜩였고 누군가는 말 한마디 없이도 스스로를 짓고 있었다. 나도 그 곁에서 침묵이 빚은 노래를 꿈꾸었지만, 한 그루 나무로 서 있을 때 누군가는 그 앞을 그렇게 스쳐 갔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시현실』2015-여름호 <집중조명-신작시>
* 박완호/ 1965년 충북 진천 출생, 1991년『동서문학』으로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