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현실』2015-여름호 <지난 계절의 시 읽기/ 이성혜>
도굴꾼들
정채원
암중에서도 죽어라
당신만을 모색하였다
무덤 속에서
앙상한 손목뼈를 밟아
으스러뜨리기도 하면서
오늘도 왕가의 계곡을 헤맨다
영영 잊혀졌을지도 모르는
트로이에서 찾아낸 금은보화 장신구들을
사업가 슐리만은 제 연인의 목에 걸어주었다지
나는 당신을 도굴해서
내 무덤에 넣어야겠다
누군가 나를 도굴해주겠지
천 년 후의 서늘한 햇빛 속에 꺼내 주겠지
누에의 무덤 7천기를 잇대어
명주솜이불 한 채를 지은 당신은
깨어나기 힘든 꿈이라서
깨어나기 겁나는 꿈이라서
앞이 안 보이는 무덤 속에서
이따금 손발이 맞는 도굴꾼을 만나기도 하지만
새끼손가락 뼈 한마디를 만나도 나는
당신만을 모색하였다
-2015,『현대시학』3월호
어느 사학자는 꼭 닫고 있던 무덤의 입이 열렸을 때 갇혀 있던 공기의 냄새에서 수천 년을 건너온 속삭임을 듣고 더없이 큰 감동과 사랑을 느낀다는데…….
나의 사랑은 도굴꾼과 같은 사랑이다.
길 없는 사막과 칼날 같은 경계와 잊힌 왕가의 계곡도 마다치 않고 달려가, 고귀한 영혼의 집을 파헤치고 손목뼈를 밟아 부러뜨려가며 금은보화 골동품을 모색하는 사랑이다. 그 사랑의 수고가 어느 사업가 연인의 목에 걸리기도 하고 박물관으로 또 다른 지하에 숨겨지기도 하겠지만 그치지 못할 사랑이다.
아무도 모르게 알 수 없는 당신의 마음을 캐내어 내 마음 깊은 무덤 속에 넣고 묻고 천년이 흐르는 어둠 속에서 가끔은 서로의 마음을 탐내는 사람도 만나겠지만 새끼손가락 한마디만 만나도 명주솜 이불 한 채를 지은 당신만을 모색하겠다. (이성혜/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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