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에서 읽은 시

단단함을 빠져나가다/ 권수찬

검지 정숙자 2014. 9. 23. 15:43

 

 <『문학의 오늘』제2회 시 부문 신인문학상 수상작 1편 )

 

      단단함을 빠져나가다

 

       권수찬

 

 

  책을 펼친 지는 오래 되었다

  기록은 닳고 닳아 지루한 자막으로 새어나간다

  머릿속이 붉어진 오후

  구석에는 당신이 비스듬한 자세로 흘러내리려 한다

  그림자는 한 뼘씩 줄어들고

  빈 고시원은 햇살에 부푼 빵처럼 지루하다

 

  치자 잎이 창으로부터 쏟아지는 마른 향기

  등 뒤에는 죽은 서가의 눈들이

  햇발처럼 쏘아본다

  자신을 들키고 있다니,

  당신은 그 페이지에서 영원히 멈출지도 모른다

  기록은 숨이 막혀

  고시원 외벽과 비슷하다

 

  간신히 화장실 구석에 끼여

  담배를 물고 있는 당신은

  이곳에서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을 언제부터 했는가

  가방에는 지로용지가 구겨져 있다

  금요일엔 일용직 근무를 서고

  쪽창 밖을 바라보는 당신은

  갈수록 욕실 안 거북이를 닮아간다

  건너야 할 문마다 단단하다

  책은 3페이지도  못 넘어가고

  책 속의 깐깐한 주인을 언제 만날 셈인가

 

  당신은 이제 묻는다

  '삶도 없이 스스로 묶이다니!'

  고시원 옆문으로 빠져나가는 당신은

  습성이 단단함보다 더 치열하다는 것을

 

 

  *『문학의 오늘』2014-가을호 <신인문학상 당선작-시> 에서 

  * 권수찬/ 1965년 전북 남원 출생, 2014년『문학의 오늘』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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