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에서 읽은 시

삽의 소리/ 고은산

검지 정숙자 2014. 8. 27. 15:07

 

 

    삽의 소리

 

     고은산

 

 

  바짝 마른 추위 몇 장 두터이 쌓인 시골 경로당에서

  창문 밖으로 고무줄 같은 음성들 들린다

  오후의 차가운 햇빛은

  허공의 혈관을 수축한다

  수축되는 것이 부정적 빛깔로

  우리를 지배할 때

  우리의 동공은 움츠리고

  세상의 분명한 얼굴은

  비좁아질 것이다

 

  지금, 좁아진 시력의 확장을 꿈꾸는

  한 시골 청년은 오늘 일거리를 찾아

  인근 도시의 인력사무실로 향한다

 

  그의 발바닥 압력이 푸르게 펄럭이는

  일터, 오늘 그의 삽질은

  동백 같은 힘으로 지상을 찢고 찢는다

  찢는 소리가 지상에 흉터를 내고

  찢는 움직임마다 추위를 상쇄한다

  상쇄하는 소리 몇 줌 가족들의 어깨 위에

  푸른 솔잎으로 안착하며

  점점 얇아지는 햇살 떨어지는 소리는

  삽질을 중지시킨다

  중지의 느슨한 맥박은

  팔뚝 근육을 이완한다

 

  옆에 드러누운 삽질의, 하루의 음성, 저녁녘을 지나며

  그의 가정 가계부 위를 쪽빛 볼펜 색깔로

  한 장 가득 긋는다

 

  드러누운 삽질 위로 별빛이 쌓이고

  내일의 푸른 생계를 기다리는 사람들,

  호명하는 삽의 내재된 소리는

  달빛 아래 누워 커져만 간다

 

 

  * 『미네르바』2014-가을호

  * 고은산/ 2010년『리토피아』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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