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양과 입술의 부적절한 관계
정선
태양을 품은 반도에서 태어난 남자가 있었다
둥근 지붕에도 낡은 석벽에도 갈라진 나뭇잎에도
뜨거운 기운과 하얀 빛이 뛰놀았다
어렸을 적 그의 입술은 얇았다
태양으로 돈을 벌겠다고 결심한 그는
튼실한 태양의 모종을 골라 바닷바람과 입김으로 키
웠다
태양은 그의 발길이 닿는 곳마다 오렌지처럼 열렸다
어느 정도 태양에 탄력이 생길 즈음
한 무리의 사람들이 태양을 팔라고 했다
깊게 파인 보조개 넓은 이마 무엇보다 두툼한 그의 입술
그는 입술이 뒤집어질 정도로 태양을 예찬했다
시커먼 낯빛은 그가 태양의 아들이라 해도 믿을 지경이
었다
굳게 입을 다물수록 입술이 얇아지는 걸 느낀 그는
열을 내보내기 위해 쉬지 않고 떠들어댔다
제가 판 태양은 가끔 화상과 피부염을 일으킬 수 있으
므로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그의 입술은 나날이 두꺼워졌다
오므렸다 폈다 뒤집어졌다 하는 그의 입술에 따라
태양은 빛나기도 하고 사위기도 했다
입술이 두꺼울수록 신뢰는 두껍다, 는 함수관계
마침내 입술에는 콧소리까지 들러붙었다
그의 찰진 입술을 보면 신뢰는 태양에서 오는 듯도 했다
갑자기 먹구름이 몰려와 큰 덩이의 태양들을 훔쳐 달아
났다
뒤집어졌던 그의 입술은 윤기를 잃고 안으로 말렸다
더 이상 들썩이지 않는 입술,
거리에 나뒹구는 태양에서는 떫고 쓴 냄새가 진동했다
*시집『랭보는 오줌발이 짧았다』에서/ 2010.10.30 (주)천년의시작 펴냄
*정선/ 전남 함평 출생, 2006년『작가세계』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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