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랑을 비껴 서서
박병란
잎보다 먼저 꽃을 피우는 봄꽃을 보면 나무가 잠시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습니다 꽃이 필 동안 잎은 졸음을 쫒고 있
는 중이지요 그러니까 꽃이 꿈이었던 게지요 꽃이 떨어지
면 그때서야 꿈에서 깨어나지요 자칫 꿈속의 보폭만큼 따
라잡지 못해 잎에게 붙잡히기도 하는 봄의 서정은 노랑입
니다
영춘화의 노랑은 창백한 담벼락에 걸터앉아 가까스로 눈
을 뜹니다
헬쓱한 꿈을 꾸느라 끝끝내 노랑을 다하지 못하고 퍼질
러져 가지 끝에 가로로 누운, 날 바람이 깍지를 낀 채 이웃
담장을 기웃거리느라 꼬박 볕 좋은 시간을 다 썼네요
산수유는 피어날 때만 사람들이 기억합니다 아무도 산수
유의 꽃잎을 밟아보지 못한 건 사라질 때 흔적을 남기지 않
기 때문이겠지요 제 달을 다 채우지 못하고 세상에 나온 산
수유의 노랑은 진짜 노랑도 아닌 채로 잊혀질까 조바심에
선잠을 보챕니다
개나리는 군더더기가 없는 노랑입니다 치솟는 꽃잎 하나
하나가 마침표 없는 문장이 되어 황홀한 현기증을 일으킵
니다 그러다가 바람에 부풀어 부스스 떨어지는 날이면 몸
을 바꿔 입듯 한바탕 풍장을 치릅니다
지금, 그대들은 노랑이 비껴간 꿈결 속에 서 있습니다
* 시집『아내는 안의 해, 라는 기별이라지요』에서/ 2014.3.5 <발견> 펴냄
* 박병란/ 1964년 포항 출생, 2011년『발견』으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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