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화비風化碑*
- 미망인
정숙자
한 획 두 획 마모 된다 그늘마저 깎여 나간다
무딜 만큼 대껴서일까
계절이 휘어서일까
붉거나 푸른 잎도 기둥 밖에서 어른거린다
죽어보지 않았으면서 너무 쉽게 죽고 싶다 말하지 마라
모든 게 시들해졌다
나를 죽인 게 무엇이냐? 내일 빼돌린 죽음 아니냐?
죽어보지 않았으면서 너무 쉽게 죽음을 들먹거리지 마라
진짜 죽음을 만나봐라 죽음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 어두운 것인가
아픈 것인가 추운 것인가
돌아오고 싶은 것인가
기나긴 것인가
남은 말 못 다한 말 새겨지다가 물러버린다
천년이 발등을 아니 적셔도 돌 아래 아니 누워도
-『시사사』 2014. 3-4월호
*필자의 신조어: 오랜 세월 햇빛과 비바람에 시달려 글자가 닳아 없어진 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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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집 『공검 & 굴원』(3부/ p. 90-91)에서/ 2022. 5. 16. <미네르바> 펴냄
* 정숙자/ 1952년 전북 김제 출생, 1988년 『문학정신』으로 등단, 시집 『액체계단 살아남은 니체들』외, 산문집 『행복음자리표』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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