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 프로젝트, 포엠포엠
정숙자
해 짧은 마지막 날// 이 날을 동지(冬至)라 한다. 오늘이 바로 그날이니 내일부
터는 낮 시간이 조금씩 길어지리라. 어떤 계절을 막론하고 하루는 모두 24시간이건
만 이 무렵엔 왠지 시간이 뭉텅 없어진 것만 같다. 흡사『어린왕자』의 ‘가로등지기
의 별’에 살고 있는 느낌이다. 그 별은 하도 작아 가로등을 켰다 껐다 하는 것만이 일
과의 전부가 아니었던가. 그러고 보면 쌩떽쥐베리도 시간부족에 꽤나 숨가빴었나보
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그런 상상을 불러올 수 있었겠는가.
K가 쑤어온 팥죽! 새알심 말랑 쫄깃한 그 팥죽을 몇 수저 떴으므로 꼼짝없이 나이
한 살을 또 보태고 말았다. 올 한해를 보내는 소회가 여느 해와는 사뭇 다르다. 내 머
리도 여느 해보다 몇 올은 더 희었으리라. 사람의 머리가 희는 것은 식물의 이파리가
붉어지는 것과 다르지 않으니 나에게도 가을이 깊어지고 있음을 알리는 신호인 것이
다. 김수영의 말을 빌리자면 “온몸으로” 직진해온 길을 뒤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 정
작 써야 할 시가 무엇인가? 남은 시가 무엇인가?
시도 시론도 요즈막보다 더 풍성했던 때는 어느 시대 동쪽과 서쪽에도 없지 않았나
싶다. 진술을 넘어, 묘사를 넘어, 상상을 넘어, 환상을 넘어 유령에까지 이르렀다. 가
히 詩냇물의 스펙트럼이 천공에 펼쳐진 무지개를 무색케 한다. 여기서 펜을 가다듬지
않으면 한단지보(邯鄲之步)에 떨어지고 말 것이리라. 무턱 돌진하기보다 돌아서야 할
때를 “분명히 알고” 넘어서야 할 때가 지금이 아닐까-자신에게 묻는다. 그 누구도, 그
무엇도 아닌 진정한 지점의 에고(ego)를 찾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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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엠포엠> 2014-봄호/ '포엠포엠이 선정한 詩人-시인의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