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표현』2014-봄호/ 특집_제3회 <시와표현> 작품상 후보작 작품론> 중 일부
퀴리온도
정숙자
아직 죽음과 떨어져 있는 사람들은 죽음을 이리저리 배치하네. 죽음에 관한 미로도 가꾸어내네. 겹겹으로 죽음에 포위된 자는 죽음은커녕 삶에 대해서조차 한마디 못하고 마네. 이런 게 바로 말할 수 없는 것인가, 침묵해야 되는 것인가, 아니 그게 아니라 침묵이 급습― 덮쳐버리는 게 아닌가. 아무 색도 아닌 시간이 떠내려가네.
꽃 잃고 잎 지우는 바위
눈뜨고 말 묻고
외로 나앉아버리는 바위
아직 죽음과 떨어져 있을 땐 그도 죽음 세포를 사변적 논리적 미학적으로 성찰했었네. 그런데 불과 일 년 사이 피붙이 셋씩이나 뜨고 보면 열쇠 꾸러미 뚝 떨어진대도 무슨 언어를 꺼낼 수 있으리오. 이렇게까지 사라지는 건가, 기호네 파토스네 전위네 신경을 자극하던 그 모든 선들이 저렇게까지 사건지평선에 나포되어 버리다니.
- 『시와표현』 2013년 겨울호
▣ 언어 너머의 사물과 만나는 시, '퀴리온도'_오홍진/문학평론가
퀴리온도는 사물이 자성(磁性)을 잃는 온도를 의미한다. 자성이라는 말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이 시의 의미가 달라질 수 있다는 말이다. 시의 문맥을 따른다면 “아직 죽음과 떨어져 있는 사람들은 죽음을 이리저리 배치하네.”라는 진술에 자성의 시적 맥락이 내포되어 있는 듯하다. 죽음과 떨어져 있는 존재는 자신에게 죽음을 객관적으로 불 수 있는 힘이 있다고 생각한다. ‘배치’라는 시어가 암시하는 대로, 죽음과 떨어져 있는 존재(물론 이것은 존재의 환상일 뿐이다)는 죽음을 자기 식대로 배치하고, 의미화 할 수 있는 사물 정도로 여기고 있는 셈이다. “아직 죽음과 떨어져 있을 땐 그도 죽음 세포를 사변적 논리적 미학적으로 성찰했었네.”라는 부분 또한 죽음의 바깥을 인정하지 않는 자의 어리석음을 드러내고 있는 바, ‘퀴리온도’는 무엇보다 이러한 죽음의 역학 속에서 그 의미가 설정되고 있다고 보면 좋을 것이다.
문제는 “아직 죽음과 떨어져 있는 사람들”조차 ‘여전히’ 죽음에 직면하고 있다는 사실에 있다. ‘아직’이라는 시어에 새겨져 있듯, 죽음은 어느 순간 갑작스럽게 존재를 찾아온다. 죽음을 이리저리 배치하던 사람 또한 겹겹으로 죽음에 포위된 채 “죽음은커녕 삶에 대해서조차 한마디 못하고 마”는 순간을 결국은 맞이하고 만다. 죽음에 직면하면 누구도 죽음에 대해 말할 수 없다. 침묵하고 싶어서 침묵하는 게 아니라 침묵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침묵한다. “아무 색도 아닌 시간”은 이런 점에서 죽음의 시간 이미지와 정확히 닮아 있다. 죽음과 떨어져 있을 때는 자랑처럼 죽음의 미학을 노래하던 존재 시인이 정작 죽음에 직면해서는 죽음을 노래하지 못하는 역설적인 상황에 맞닥뜨린다. 어떻게 해야 할까?
“불과 일 년 사이 피붙이 셋씩이나 뜨고 보면”이라고 시인은 쓰고 있다. 시인에게 죽음은 그러니까 타자의 죽음으로 다가온다. 피붙이 셋이 일 년 사이에 죽어버렸다. 죽음을 논리적으로, 미학적으로 성찰하던 시인이었으니 피붙이 셋의 죽음 또한 당연히 논리적 미학적으로 성찰해야 했다. 그런데 그렇게 되지 않는다. 무엇보다 머릿속이 혼란스럽다. 생각이 아예 멈추어버렸다. 생각이 없는데 어떻게 언어가 생각날까? “열쇠꾸러미 뚝 떨어진대도 무슨 언어를 꺼낼 수 있으리오.”라는 시구에 타자의 죽음에 직면한 시인의 심리가 정확히 나타나 있다. 숱한 사물들을 시의 세계로 끌어들이던 언어의 자성(磁性)이 사라져버렸다. 기호는 기호대로, 파토스는 파토스대로 저 죽음 너머의 사건의 지평선에 나포되었다. 죽음을 이리저리 배치한다고 뽐내던 그 잘난 마음은 어디로 갔는가? 타자의 죽음 앞에서 이리 쉽게 무너질 시심(詩心)이라면, 자기의 죽음을 앞두고는 과연 어떨 것인가?
2연에서 시인은 꽃을 잃고 잎을 지우는 바위에 주목한다. “눈뜨고 말 묻고/ 외로 나앉아버리는 바위”의 처연한 모습을 표현하기도 한다. 바위는 생을 말하지 않는다. 죽음 또한 말하지 않는다. 바위는 말하지 않고 자신의 생을, 죽음을 살아간다. 거기에는 논리도 없고 미학도 없다. 아직 죽음과 떨어져 있다고 떠벌이는 존재 역시 없다. 저 사건의 지평선에서 건져 올린 (인간의) 언어로 생과 죽음의 세계를 넘나들던 이들에게 바위는 “아무 색도 아닌 시간”의 어떤 모습을 에둘러서 보여준다. 아무 색도 아닌 시간에 있으니 죽음(비언어)의 급습 앞에서도 바위는 외로 나앉아버릴 수 있다. 시간이 떠내려간다. 자성을 잃은(인간의) 언어가 떠내려간다. 아무 색도 없는 시의 세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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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홍진/ 2003년 <문화일보> 신춘문예 평론 등단.
작품상 수상작, 김종태「오각(五角)의 방」, 2013년『t시와표현』겨울호
-작품상 후보작
이영춘「밤의 데몬(DEMON」,2013년『t시와표현』가을호
이은봉「시간의 배」, 2013년『t시와표현』여름호
박찬일「중앙SUNDAY」, 2013년『t시와표현』봄호
윤의섭「우기」, 2013년『t시와표현』봄호
유종인「폭설과 동파육(東坡肉」, 2013년『t시와표현』여름호
우대식「정선을 떠나며」, 2013년『t시와표현』가을호
송찬호「분홍 나막신」, 2013년『t시와표현』겨울호
정숙자「퀴리온도」, 2013년『t시와표현』겨울호
박현수「얼핏 본다는 것」, 2013년『t시와표현』가을호
2013년 12월 31일
본심: 최문자 박주택 오태환
예심: 김백겸 이성혁 서안나 김영찬 김명철
* 『시와표현』 작품상 심사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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