객담 및
정숙자
나 자신이 내 형틀이다
곧추 일어나 양팔 벌리면
지체 없이 열십자가 드러난다
태어나기도 이전에 벌써, 나는
내 형틀을 낳고 형틀은
형량을 끌고 형량은 삶을 몰았다
홧홧하거나 헛헛한 돌풍
그것이 때론 가슴을
이마를 등을 치기도 했다
지금 창밖에선 가을이 타고
내 안엔 더 이상 탈 것도 없다
홧홧하거나 헛헛한, 생생하거나 생경했던 날
아무도 없는 게 아니었구나. 하늘과 새와 더불어 네가
늘 함께 했구나. 네가 있어 이슬도 별을 머금고 꽃들은 내
일을 기약했구나. 몇 십억 나이를 먹어 너는 내 해찰도 접
어온 거니? 겨우 몇 십 년 도르르 풀린 목숨이기에… 그
리 헤아린 거니? 모든 이가 쉬이 떠난다 해도 넌 항상 그
렇게, 이렇게 곁에 있구나. 바르고 부드러우며 중심이면
서 배경으로서 깊이깊이 비추어주는 너 하나면 온 세상
믿고 푸른데… 너무 많이 아파했구나. 흔들리는 거실에 들
어 말없이 독대한 오랜 벗이여. 나이에 아랑곳없이 ‘너’라
불러도 환한 붕우여.
엎드린 강물 앞에선 늘 미안했다
좀 더 형량을 부리는 밤엔
무고한 벌레 울음도
달빛의 관절에도 무리가 갔다
안 보이는 문 두드릴 무렵
삐걱거린 발자국들도
형틀도 이제 조도를 수습하는데
-『유심』2014-1월호
----------------
* 시집『액체계단 살아남은 니체들』에서/ 2017.6.26. <(주)함께하는출판그룹파란> 펴냄
* 정숙자/ 1952년 전북 김제 출생, 1988년『문학정신』으로 등단, 시집『뿌리 깊은 달』『열매보다 강한 잎』등, 산문집『행복음자리표』『밝은음자리표』
'제9시집· 액체계단 살아남은 니체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액체계단/ 정숙자 (0) | 2014.07.10 |
---|---|
만들어진 침묵/ 정숙자 (0) | 2014.03.15 |
지성인/ 정숙자 (0) | 2013.12.09 |
순환과 연쇄/ 정숙자 (0) | 2013.12.09 |
일단 이것을 나비라고 부른다/ 정숙자 (0) | 2013.09.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