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단 이것을 나비라고 부른다
정숙자
언뜻 펼치면 두 쪽이지만 수십 혹은 수백 쌍의 날개로
구성 됨
각 날개마다 고유번호가 존재, 치밀히 계산한 선과 각
으로 활주로를 밀어 올림. 누군가의 정신이기도 육체이기
도 한 이 나비는 곧 사라질 수도, 천년토록 살아남을 수도
무한 복제를 통해 영생을 누릴 수도
있음
이 나비는 역사의 쟁점의 현장의 얼룩, 미래로 달릴 궤
적의 차원
이 나비는 투명하고 긴 촉수를 벋어 가루받이도 한다
고 한다
그리하여 날개는 날개를 낳고 날개는 또 날개를 잇고
(……) 뿌린 나머지
날개의 강, 날개의 길, 날개의 난지도까지도 키울 수 있
다고 한다
거미야, 내 얼굴로 기어 다니지 마라
너를 좋아하지만
예뻐하지만
네가 얼굴을 타고 내려오면
너인 줄 알기도 전에
내 손이
너를 문질러버렸잖니?
어떤 나비의 날개에는 이토록 난해한 무늬도 암호화
되어
도무지 해독 불가능한 거미와 얼굴의 관계에서 왜 손
이 끼어들었는지 천착하다가 나는 그만 그것을 운명이라
고 결론짓고 말았다
그래서 나는 책장에 가득 꽂힌 나비들을 바라보면서 생
각하는 것이다
진즉부터 <운명>을 읽었어야 했는데 <운명>을 살기만 했
구나 하고, 그러면서 또 이런 상념에도 잠겨보는 것이다
수도 있음
나비의 날개에 그려져 있지 않은 그 어떤 일도 일어날
수 있음을
드디어 운명 읽는 밤, 그러나 그런 밤에도 나는 여전히
나비를 사랑하고 아직 태어나지 않은 나비를 위해 허공을
또 산책하는 것이다
-『이상』2013-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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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집『액체계단 살아남은 니체들』에서/ 2017.6.26. <(주)함께하는출판그룹파란> 펴냄
* 정숙자/ 1952년 전북 김제 출생, 1988년『문학정신』으로 등단, 시집『뿌리 깊은 달』『열매보다 강한 잎』등, 산문집『행복음자리표』『밝은음자리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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