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수에 대한 보고서
최광임
겨울 한 철 내 집에 짐승 한 마리 살았어요 그는 머언
바다에서 왔다고도 하고 산골짜기 깊은 응달에서 왔다
고도 했어요 그와 내가처음 소통한 언어는 눈물이었어
요 그에게서 파도 냄새가 나기도 했으며 골짜기 굽이쳐
흐르던 물소리가 들리는 듯도 했어요 나는 그에게 산짐
승이란 이름을 붙여주었어요 그의 언어는 야생성뿐이었
으니까요 해빙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 한 동안 봄은 멀리
있는 듯했지만 상관없는 일이었어요. 여전히 격렬과 은
유의 극점을 오가는 그를 나는 산(生)짐승이라 불러주기
만 하면 되었어요
어느 날은 소파에 앉아 그를 유심히 관찰하기도 해요
야생에서 왔다는 것 말고는 처음부터 언어가 다른 우리
였지만 볕 좋은 창가랄지 푹신한 침대에 걸터앉아 조곤
이 바라보노라면 햇살의 아이 서넛 낳고 싶어지기도 해
요 그러나 대화법을 모르는 그는 장식장이나 에어컨 뒤
음습한 곳으로 숨어들기도 하는데 많은 시간이 흐른 뒤
에야 나타나곤 해요 그때마다 눈빛이 심하게 흔들리고
입에서 퀴퀴한 비린내가 진동해요 어느 사이 봄은 창 가
까이 오고 있었나 봐요 그의 외출이 잦아지는가 싶더니
더 이상 그의 눈물을 볼 수 없게 되었어요 그가 드나들
던 음습한 구멍에선 황사바람만 들이치고, 있기도 없기
도 한 그에 대하여 무심해지는 날들이 가고 있었어요
* 시집『도요새 요리』에서/ 2013.12.5 <북인> 펴냄
* 최광임/ 전북 변산 출생, 1987년《전주개천예술제》연극 부문 최우수 연출상 수상.
'시집에서 읽은 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 간유리를 본다/ 김종태 (0) | 2014.01.05 |
|---|---|
| 나는 다혈질이다/ 안차애 (0) | 2014.01.05 |
| 시품 24/ 하덕조 (0) | 2013.12.19 |
| 물구나무서다/ 김세영 (0) | 2013.12.16 |
| 인질범/ 이영광 (0) | 2013.12.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