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에서 읽은 시

아득함을 밟는 시간/ 서정임

검지 정숙자 2013. 11. 29. 15:15

 

 

     아득함을 밟는 시간

 

      서정임

 

 

  몇 시간 내린 폭설을 뒤집어쓰고

  꽁꽁 얼어붙어 있는 강,

  눈앞에 흔적도 없이 지워진 한줄기 기억이다

  강의 긴 속눈썹 같은 갈대도 한 치 떨리지 않고

  나는 나도 모르게 문 닫힌 그 기억의 표면을 더듬어 밟는다

  그러나 떠오르지 않는 옛날 영화처럼

  발원지가 보이지 않는 먼 하류, 아득하다

 

  내 안에 침전물로 가라앉아 있던 또 다른 기억들이

  가닥가닥 물풀 같은 고개를 치켜들고

 

  두 발로 쿵쿵 언 강을 구른다

  발밑에서 아슬아슬 비춰 보일 것도 같은 그 기억을 흔든다

  단단히 얼어붙어 있는 저 강줄기 어디쯤인가 쩌엉쩡 가슴뼈

를 열어젖히며

  내 전신을 잡아 울리던 클라이맥스 한 장면 출렁 보여줄 것

도 같은데 

 

  흐르고 흘러야 하는 것들이 기습 강타한 폭설 더미에

  한 번쯤 발목이 깊숙이 빠져보기도 하는 것

  붉은 낯빛을 떨군 채 미동도 없이 서 있는 해당화 줄기에 언

뜻 저녁이 들고

  쉽사리 깨지지 않는 기억의 표면을 더듬어 밟는 시간이 차다

 

 

  * 시집『도너츠가 구워지는 오후』2012..11.30 <문학선社> 펴냄

  * 서정임/ 2006년 계간『문학.선』으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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