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득함을 밟는 시간
서정임
몇 시간 내린 폭설을 뒤집어쓰고
꽁꽁 얼어붙어 있는 강,
눈앞에 흔적도 없이 지워진 한줄기 기억이다
강의 긴 속눈썹 같은 갈대도 한 치 떨리지 않고
나는 나도 모르게 문 닫힌 그 기억의 표면을 더듬어 밟는다
그러나 떠오르지 않는 옛날 영화처럼
발원지가 보이지 않는 먼 하류, 아득하다
내 안에 침전물로 가라앉아 있던 또 다른 기억들이
가닥가닥 물풀 같은 고개를 치켜들고
두 발로 쿵쿵 언 강을 구른다
발밑에서 아슬아슬 비춰 보일 것도 같은 그 기억을 흔든다
단단히 얼어붙어 있는 저 강줄기 어디쯤인가 쩌엉쩡 가슴뼈
를 열어젖히며
내 전신을 잡아 울리던 클라이맥스 한 장면 출렁 보여줄 것
도 같은데
흐르고 흘러야 하는 것들이 기습 강타한 폭설 더미에
한 번쯤 발목이 깊숙이 빠져보기도 하는 것
붉은 낯빛을 떨군 채 미동도 없이 서 있는 해당화 줄기에 언
뜻 저녁이 들고
쉽사리 깨지지 않는 기억의 표면을 더듬어 밟는 시간이 차다
* 시집『도너츠가 구워지는 오후』2012..11.30 <문학선社> 펴냄
* 서정임/ 2006년 계간『문학.선』으로 등단
'시집에서 읽은 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양동마을 서백당/ 이 섬 (0) | 2013.12.01 |
|---|---|
| 산책/ 권순자 (0) | 2013.11.30 |
| 천재 건축가 김석철 가라사대/ 박찬일 (0) | 2013.11.29 |
| 여여나무/ 박제천 (0) | 2013.11.26 |
| 침착한 균열/ 조연수 (0) | 2013.11.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