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에서 읽은 시

여여나무/ 박제천

검지 정숙자 2013. 11. 26. 12:53

 

 

     여여나무

 

      박제천

 

 

  여여나무랑 눈을 맞출 때가 있다

  가지들 허공에 써나가는 초서를 물들이는

  8분 19초 전의 저 햇살, 8분 19초 뒤에 읽는 햇빛의 말

  두루마리 서한이 하염없이 보여주는 나무의 수화를

  혼자서 읽다가

 

  문득 나는 자꾸 작아진다 갑자기 찾아든 왜소증을 이길 수

없어

  술을 한 잔 따르자,

  바다의 해일처럼 술이 흔들리고 내가 떠내려간다

 

  문득 하늘을 보자

  해가 그야말로 누가 던진 원반만 하다

  멀리 있을수록 작게 보이느니

  나 역시 먼 곳의 나를 귀뚜라미만 하게 보는 걸까

 

  이번엔 여여나무가 되어 풀밭에 뿌리를 내리고 서 있자니

  나보다 스무 배는 키가 큰 풀들이 거목들처럼 울창하다

  햇빛이며 달빛을 모아

  한밤중에 자연등을 켜고, 자연처럼 그 물결 따라 흔들리면

  나는 문득 바다가 되고, 바다는 거실이 된다.

 

 

   * 시집『호랑이 장가가는 날』/ 2013.11.25 <문학아카데미> 펴냄

   * 박제천/ 서울 출생, 1965~1966년『현대문학』으로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