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여나무
박제천
여여나무랑 눈을 맞출 때가 있다
가지들 허공에 써나가는 초서를 물들이는
8분 19초 전의 저 햇살, 8분 19초 뒤에 읽는 햇빛의 말
두루마리 서한이 하염없이 보여주는 나무의 수화를
혼자서 읽다가
문득 나는 자꾸 작아진다 갑자기 찾아든 왜소증을 이길 수
없어
술을 한 잔 따르자,
바다의 해일처럼 술이 흔들리고 내가 떠내려간다
문득 하늘을 보자
해가 그야말로 누가 던진 원반만 하다
멀리 있을수록 작게 보이느니
나 역시 먼 곳의 나를 귀뚜라미만 하게 보는 걸까
이번엔 여여나무가 되어 풀밭에 뿌리를 내리고 서 있자니
나보다 스무 배는 키가 큰 풀들이 거목들처럼 울창하다
햇빛이며 달빛을 모아
한밤중에 자연등을 켜고, 자연처럼 그 물결 따라 흔들리면
나는 문득 바다가 되고, 바다는 거실이 된다.
* 시집『호랑이 장가가는 날』/ 2013.11.25 <문학아카데미> 펴냄
* 박제천/ 서울 출생, 1965~1966년『현대문학』으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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