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에서 읽은 시

맹물/ 이향아

검지 정숙자 2013. 7. 25. 01:57

 

 

    맹물

 

    이향아

 

 

  나를 물로 보는 사람이 있어 천만다행이다

  나를 가끔 맹물로 보고 물봉으로 보고 물컹이로 취급

하는 사람이 있어

  나, 이만큼이라도 살아남았다

  맹물로 본다는 것은 한마디로 우습게 깔본다는 것이

지만

 그야 어떠랴 괜찮다

  물로 보는 한 나는 순하게 풀려서 흐를 것이고

  눅진하고 은밀한 데서 빛을 기다리는 이무기처럼

  하늘에 닿을 꿈도 꿀 수 있겠지

  오르다 곤두박질쳐 다시 물이 되더라도 걱정할 건 없다

  나는 돌아와 저 마른 땅을 무욕의 실핏줄로 어루만지리

  맹물로 적시리, 나는 지금 자랑으로 가슴이 터진다

  물봉이라도 무방한 일, 흰 깃발 두 팔에 펄럭이면서

  아무데서나 나를 봉헌할 것인즉,

  세상은 비로소 나를 부르리

  밤낮으로 나를 찾아 부리리

  내 생애 소원하던 그대로 나는 넉넉하고 따뜻할 것이다

  물불을 가려 편을 가를 때 나를 물이라 하니 천만 번

다행이다

 

 

  * 시집『물푸레나무 혹은 너도밤나무』에서/ 2009.11.18 <도서출판 고요아침> 펴냄

  * 이향아/ 충남 서천 출생, 1963~1966년『현대문학』추천(3회 완료)으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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