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일
김안
11월의 늦은 오후, 멍한 상태로 식탁에 앉아 있었다. 아직까지 전화가 오지 않았다는 건 내일도 내내 이렇게 앉아 있어야 한다는 것이겠지. 깊은 한숨이 나왔다. 그때 천장까지 닿을 정도로 기다란 그림자가 나타났다. 어머니였다. 어머니는 내게 식사는 잘 챙겨 먹는지, 물으시고 냉장고 문을 열었다. 나는 오랜만에 뵌 어머니 모습에 얼떨떨하면서도 반가웠다. 철모르는 호기심으로 가득한 강아지 같은 마음이었다. 엄마, 나 어렸을 때 키웠던 강아지 이름이 뭐였죠? 무슨 소리니? 강아지라니. 내가 그 강아지가 된 마음이라니까, 오랜만에 엄마를 보니. 냉장고에서 하얗고 서늘한 빛과 연기가 뿜어져 나왔다. 어머니는 냉장고 문을 열어두고서 내게로 다가와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우린 강아지 키운 적이 없어. 왜 나 예닐곱 살 때 무당집 골목에 살 적에 키웠잖아. 굶어 죽었던가, 맞아죽었던가, 그래서 아버지가 화장실 옆 나무에 묻어준. 나는 허기진 짐승처럼 어머니의 신선한 손목을 물어뜯으며 말했다. 어머니는 다정하게 손목을 내어주었고, 다른 한 손으로는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넌 아버지가 없잖아? 생각해보니 내겐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없었다. 난 왜 그걸 모르고 있었을까? 어린 시절, 밤마다 창밖으로 검은 그림자들이 서늘하게 흘러 들어와 어머니의 몸을 휘감았는데, 나는 그것을 아버지라 여긴 것일까? 어머니는 남은 한쪽 손목을 내어주었다. 그건 골목들이란다. 양팔이 사라진 어머니는 하얗게, 깊게, 서늘하게, 침묵하고 있는 냉장고 속으로 뱀처럼 기어 들어갔다. 어머니의 팔에서 흘러나온 붉은 그림자들이 밤의 골목처럼 길게 이어지고 있었다.
-전문-
발문> 한 문장: 우리는 살아가면서, 우리 안의 에너지를 주고받는다. 우리 안에 존재하는 에너지의 기원과 종말을 인식하기 힘들다. 다만 우리는 그것이 움직이는 물질이라는 것을 안다.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에너지를 보낸다.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에너지를 줄 수도 있지만, 거부하기도 한다. 대상이 없어진 '나'는 다른 대상에서 에너지를 찾는다. 그것도 힘들면 자아를 파먹으며 살아가기도 한다. 에너지는 우리의 인식이나 감정과 함께 작동하는 듯 보이지만 꼭 그렇지 않다. 그것은 욕망처럼 통제가 불가능하다. 귀신은 에너지를 돌려받을 육체가 없다. 귀신은 아무것도 수거하지 못한다. 자신의 육체에서 더 이상 에너지가 돌지 않음을 느낄 때 인간도 귀신과 마찬가지의 상태에 이르는 듯하다.
『귀신의 왕』에서 귀신의 이동 경로를 탁월하게 묘사한 작품 중 하나는 「기일」이다. 귀신이 처음에 만나는 대상은 '어머니'이다. "어머니는 내게 식사는 잘 챙겨 먹었는지, 물으시고선 냉장고 문을" 연다. 어머니의 기일이라서, 어머니가 찾아와 냉장고를 살피는 듯하다. 화자는 오랜만에 본 어머니가 반갑다. 어머니에게 어렸을 때 키웠던 '강아지'의 이름을 묻자 어머니는 '무슨 소리?'냐고 되묻는다. 화자가 '굶어 죽었던가, 맞아 죽었던가' 하는 그 강아지라고 되묻자 어머니는 우리는 '강아지를 키운 적이 없'다고 한다. 이 부분에서 어머니의 기일에서 강아지의 기일로 전환된다. 화자는 "허기진 짐승처럼 어머니의 신선한 손목을 물어뜯으며" 아버지에 대한 질문으로 넘어간다. 어머니는 "넌 아버지가 없잖아?"라고 답변한다. 강아지의 기일에서 다시 아버지의 기일을 떠올리게 된다. 작품의 후반부에 가면 어머니가 내준 '손목'은 '골목'이 되고 "어머니의 팔에서 흘러 나온 붉은 그림자들이 밤의 골목처럼 길게 이어지고 있었다."라고 끝이 난다. 화자는 어머니, 강아지, 아버지, 유년 시절을 이동하며 자신의 흔적을 찾는다. 여기까지 오면 모든 가족의 기일로 읽힌다. 내가 사랑했던 대상과의 감정의 다발이 끊어졌을 때, 세상의 그 무엇도 내 것이귀되지 못할 때 '나'는 귀신의 입과 귀를 선택한다. 현실에선 진화, 환상에선 역진화, 그 반대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시집에 출몰하는 귀신은 대상을 갈아타며 자신이 살아갈 골목을 개척한다. (p. 시 24-25/ 론 114-116) <정우신/ 시인>
김안에 대하여/ 그의 시는 애써 도달했다고 자부하는 이 시대의 합의와 관념에 합당해 보이는 정답을 유도하는 질문을 내려 놓는 것이 아니라, 과정에서 출발하여 거대한 합의들을 비판하고, 다시 자리매김하는 인식의 최전선으로 우리를 데려갈 것이다. 삶이 첫 선을 넘긴 후 이미 되돌아갈 수 없는 것이라면, 김안의 시를 읽고 나서 우리는 어느덧 탄탄한 어둠과 힘찬 우울, 명료한 비탄의 세계에 당도한 우리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p. 120-121)
-조재룡, 「시인-시인의 자격으로 쏘아올린 물음들」(시집 『미제레레』 해설 중에서)
김안에 대하여/ 파스칼 키냐르는 『은말한 생』의 제3장에서 인류가 공들여 만든 대부분의 걸작은 알려지지 않은 채 사라진다는 하나의 가설을 제시한다. 이어서 그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그것들의 부재는 부재로서 현존해야만 한다. 결여된 곳으로서, 그것이 나의 신념이다."라고 말해본다. 마찬가지로 김안 시인의 시에서 우리는 '결여된 것'으로서의 인간의 형상을 확인하는 것이 아닐까. 이렇게 말해야 할 것만 같다. 사람의 가장 아름다운 형상은 대부분 실현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증언조차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침묵 속에서 잊힌다. 김안 시인의 시는 우리에게 침묵을 상기하도록 만든다. 침묵은 우리에게 말한다. 뒤를 돌아보았을 때 역사의 그늘 속에서 다가오는 것이 있다. 사람이 꿈꾸었던 사람의 형상이 있다. (p. 120)
-박동억, 「역사화되지 않는 인간」(계간 『작가들』, 2024년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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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집 『귀신의 왕』에서/ 2024. 11. 15. <아시아> 펴냄
* 김안/ 1977년 서울 출생, 2004년『현대시』로 등단, 시집『오빠생각』『미제레레』『아무는 밤』『Mazeppa』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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