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화집에서 읽은 시

구름이 들려주는 시 외 1편/ 정우림

검지 정숙자 2024. 8. 18. 02:33

 

    구름이 들려주는 시 외 1편

 

     정우림

 

 

  초원에서는 구름이 말을 한다지 그 말귀를 잘 알아들은 말과 양 떼가 그 노래를 따라 부른다지 야크는 천천히 걸으면서 읊조린다지 눈 속에서 꽃대를 밀어낸 에델바이스가 여름의 눈썹으로 피어난다지 그렇게 천천히 푸른 풀밭을 산책하며 건너간다지 짧은 여름이 온다지 구름이 말을 건네면 풀을 뜯는다지 향기 나는 꽃은 먹지 않는다지 오물거리는 입가에 향기가 묻어난다지 구름은 어린아이 발자국을 따라간다지 바람의 손을 잡고 오래 기다린다지 밤에는 별의 어깨를 두드려 주고 그러다가 울기도 한다지 구름의 틈 사이로 번개를 치고 비를 쏟아 낸다지 아주 멀리서 다가온다지 구름은 초원을 어루만진다지 때론 빠르게 때론 무섭게 두드리다가 초원이 깜짝 놀라 길을 내고 강을 만들게 한다지 그러다 구름은 초원을 다독인다지 자라나는 어린 짐승들을 보살핀다지 초원에서 함께 뛰어논다지

    -전문(p. 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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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코카서스 할아버지의 도서관

 

 

  할아버지가 살고 계시다는 먼 산을 찾아갔습니다 

  새의 그림자가 시간을 돌립니다

  검은 돌에 새겨진 불꽃의 글자들

 

  구름이 태어나는 벼랑 같아요

  한 번도 뵌 적 없는 할아버지 만나면

  주름 깊은 이마를 더듬어 볼 수 있을까요

  걷다가 도착한 곳이 여기, 비탈엔 검버섯이 많고

  나무들은 등이 굽었어요

 

  할아버지 생각은 한 번도 써 본 적 없네요

  불에서 태어나신 할아버지

  그 먼 이름에 유황 냄새가 배어 있는 아버지의 아버지

  돌 속에서 살다가 돌 속에서 돌아가신 돌의 조상님

 

  벼랑의 돌주머니에 제비가 살고 있네요

  할아버지 품에서 알이 되고

  날개를 달고

  검은 눈을 가진 새

  주술에 걸린 밤과 낮의 수염 자락에 매달린 집

  돌기둥 육각형 안에는

  포도주처럼 발효한 이야기들이 가득합니다

 

  할아버지의 불은 차갑게 식어 돌이 되고

  지금도 돌덩이 등에 지고 산을 오르시나요

 

  꿈이 쏟아져 내리는 밤마다

  말랑말랑한 과일을 찾아 맛봅니다

  돌도서관에 사시는 할아버지,

  살구나무 피리를 불어드릴 테니

 

  진흙과 석양의 음악을 조금 들려주시면 안 될까요

  불의 씨앗을 저에게 주시면 안 될까요

      -전문(p. 3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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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집 『코카서스 할아버지의 도서관』에서/ 2024. 8. 15. <파란> 펴냄

정우림/ 경기 용인 출생, 2014년 『열린 시학』으로 등단시집『살구가 내게 왔다』『사과 한 알의 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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