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산문집 · 밝은음자리표

시와 어머니/ 정숙자

검지 정숙자 2010. 11. 7. 00:06

 

    시와 어머니

 

      정숙자

                                            

 

   어머니는 진실의 이데아다. 진실은 인격의 범주이고 모성은 불변의 원형이기 때문이다. 아직 영혼으로 떠돌던 두 발을 떡잎으로 품어주신 어머니는 맑고 따뜻한 대지이며 창공이다. 어머니는 장차 이상을 쥐고 날아오를 어린것에게 걸음마를 가르친다. 자신의 출생에 있어서 어머니보다 더한 빛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을 것이다. 어머니는 어떤 장애 앞에서도 휘거나 꺾이지 않는다. 삶의 접점이자 박애의 출발지인 어머니. 진실이 판도라의 상자로 와해 된지 오래지만 어머니의 가슴속에만은 여전히 남아 있다. 그 인내, 그 용기, 그 깊이… 그리움과 사랑의 표상으로서 어머니는 이 땅에 존재한다.  

       

   어머님

   당신이 떠나신지

   오늘로 스무날 째

   산촌엔 호젓이 가을비가 내립니다.

 

   그 빗속을

   당신이 남기신

   그 조그마한 우산을 받고

   저는 생활을 위해 나섭니다.

   연로하신 후로

   언제나 출타하실 때면 손에서 떼지 않으시곤

   아득히 이 쓸쓸한 북쪽 산촌까지

   저승길로까지 받고 오신

   이 노인용 검정 헝겊우산……

   이걸 받고 있으면

   비도 저의 머리와 어깨엔 내리지 않으며

   전 어머님과 함께 있는 꼭 그런 심정입니다.

 

   뿐일까요. 아직 제가 어리고

   당신께서 젊으시던 옛날부터

   할머님이 되시어 조용히 살으시기까지

   항시 저희들 마음속에 부어주시던

   그 부드러운 애정의 그늘에 기어드는 것 같아

   저의 가슴은 뿌듯이 뜨거워지며

   달콤한 회상에 젖어듭니다.

 

   어머님

   저는 시방

   이 조그마한 우산 속으로부터

   이승에 퍼붓는 차가운 빗살을 바라보고

   저 오록한 먼 산 단풍을 바라봅니다.

                                           - 어머니의 우산 -

   

   이 시를 지은 마루야마 가오루(丸山薰, 1899~1974)는 일본 오이타에서 태어났다. 그는가․배구에 맥을 잇는 ‘시키(四季)’ 동인이었으나 전통성과 이데올로기의 표방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어떤 집단이나 에콜에도 안주하지 않았으며 오로지 시의 의미와 예술성을 중시했다고 한다. 대학을 중퇴하고 무직인 채 유산을 탕진하며 삶의 붕괴감에 빠졌던 그는 서정의 혁신과 국제 감각을 실험/도모한 현대시인 중 한 사람으로 꼽힌다.

   순탄치 못한 그의 삶은 그럴만한 동기를 지닌다. 일본 제국주의가 우리나라를 식민지화했을 당시 마루야마 가오루의 부친이 경시총감이었다는 사실이 그것이다. 여섯 살 난 그가 서울에 왔을 때, 아버지의 관사는 부지 1만 평에 정원이 2천 평에 이르는 호화판이었다. 담장을 에워싼 경찰관의 엄호와 인공 연못, 놓아기르는 열댓 마리의 학이 뜰을 수놓았다. 그러나 그 학들은 날아가지 못하도록 날개가 절단되어 있었고, 그 광경을 목격한 마루야마 가오루는 ‘주권과 언어를 빼앗긴 한반도 민중의 치솟는 감정’을 자기화할 수밖에 없는 인간으로 성장하였다.

 

   “아버지를 베어 죽여라/어머니를 베어 죽여라/모두 베어 죽여라(병든 뜰, 부분)

 

   이 극단적인 표현을 보더라도 그 대상이 단지 자신의 부모가 아니라, 더 큰 차원의 압제자임을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조선(朝鮮)’이라는 제목의 산문시에서는 쫓기는 아씨와, 그녀의 목덜미를 잡으려는 악마가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본질은 가장 가까이 있으면서도 작품으로서의 성공을 쉽사리 허락하지 않는다. 본질이야말로 중심부에 위치한 감정이며 보편적 감성인 까닭이다. 개개인이 자신의 삶과 앎에 깊이 침투해 들어갔을 때 본질은 상상력에 힘입어 그 구조를 드러낸다. ‘생각지도 않았던 착상’이란 있을 수 없다. 직간접 경험에 의한 전의식과 무의식의 협력으로 보아낸 결정이 곧 영감이니까 말이다. 그러므로 시인들은 똑같은 사물 앞에서도 자기만의 관점과 기호에 따라 언어군을 보유한다.

   수많은 나아감과 돌아옴의 반복 속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내면의 이야기를 듣는다. 길을 갈 때나 잠들기 전, 혹은 홀로이 찻잔을 앞에 두었을 때, …심층에서 걸어 나온 자신을 만난다. 이전에 만났던 자기가 아니라 매번 새로 태어난 자아와의 대화인 것이다. 이것을 내적 갱신이라 일컬어도 좋으리라. 이 내적 갱신의 과정에서 우리는 문득문득 본질과 마주친다. 그리고 본질의 장르에 속하는 사단칠정은 누구를 막론하고 정신치수에 꼭 맞는 영감을 공급한다.

   그러므로 시는 시인의 복제일 수밖에 없다. 지적능력과 천재성, 성향까지도 가감 없이 드러낸다. 육체적 결합에 의한 자식이야 청출어람이 가능하지만, 시는 제아무리 기교나 허세를 부린다 해도 자신의 키를 넘어설 수 없다. 거듭거듭 닦인 작가정신만이 직선으로 본질에 진입, 보편적 감동을 깨워낼 수 있을 것이다. 마루야마 가오루의 ‘어머니의 우산’ 역시 본질을 다루어낸 성과로 볼 수 있다. 본질적 서정과 보편적 배경을 살린 공감의 진수이자 분수령임을 의심하지 않아도 좋을 듯하다.

    

   신의 체세포가 아닐까. 어머니는 인간을 초월한다. 어머니의 마음은 투명하게 흐르는 우정을 포함하고, 푸르게 타오르는 사랑을 수렴한다. 어머니의 마음은 자식의 발끝에 엎드리는 그림자다. 교문을 드나들고, 입원실을 지키며, 자식이 갇히는 신세가 되면 영치금을 쥐고 붉은담에 기대어 해를 넘긴다. 자식을 위하여서는 부끄러움도 세월도 두려움도 잊는다. 자식의 얼굴에서 행복을 찾고, 자식의 눈에서 희망을 사며, 자식의 웃음에서 고해를 벗어난다. 어머니의 마음은 변치 않으므로 연애보다 그윽하고, 어머니의 마음은 넓고 깊으므로 우정보다 유장하며, 어머니의 마음은 오로지 내 편을 비추시므로 성령보다 지극하다. 굳이 사랑이라고 아니하여도 어머니의 마음은 이미 사랑이다. 그 자체로 빛이며 향기이며 영원인 까닭이다. 

   어머니! 나는 아직 이보다 다정한 상징을 알지 못한다. 어머니! 하고 숨을 모으면 온 세상이 문득 안온해진다. 내 몸은 어머니의 피 한 방울이 자라난 잎새이며, 내 웃음은 어머니의 눈물 한 줄기가 배어든 기도이며, 내 글은 어머니의 삼백예순 뼈마디를 녹인 염려다. 시 한 구절, 편지 한 쪽을 어찌 허술히 할 수 있으랴.

   형제자매이기 전에, 아내이기 전에, 이웃이기 전에, 나 자신이기도 이전에 나는 어머니의 숨결이었다. 나는 어머니의 한 조각 유품이다. 내 몸이야말로 어머니가 아낀 꽃병이 아니었던가. 그러나 꽃다발 안아본 적 없는 꽃병, 비바람 구름만이 드나든 꽃병, 내내 외따로 서 있는 꽃병. 삶이라는 이 기묘한 마당에서 이제 또 어디에 기대야 할까. 슬픔, 우울, 좌절… 희망, 사랑, 행복… 이 많은 품종들을 어떻게 다 섭렵해야만 할까.

   

   어머니를 여읜지 어느새 여섯 해가 되었다. 내 마흔여섯의 겨울, 어머니는 여든셋의 정월에 눈을 감으시었다. 이제나저제나 어머니를 떠올리는 내 가슴속에는 소리 없이 흐르는 강물이 길다. 칠순도 중반을 넘어서야 오라버니댁으로 오셨던 어머니. 기와집 너른 울과 김제벌을 떠나오시곤 노인정만을 오가며 하루하루를 보내신 우리 어머니.

   그 때 드려야만 했다. 돈이 드는 것도, 힘이 드는 것도 아닌, ―마음만 먹으면 낼 수 있는 시간을, 그때 푸근히 드렸어야만 했다. 그러나 나는 어느 하루도 온전히 어머니 곁에 머물지 않았다. 어릴 때 이미 내 영혼을 낚아챈 시는, 나를 짐승으로 만들어 버렸던 것이다. 책을 더 보아야 할 것만 같아, 시를 더 섬겨야 될 것만 같아, 어머니가 누워계실 때조차 잠시잠시 얼굴을 비치는 게 고작이었다.

   그런 나를 위하여 어머니는 탑돌이를 하셨다. 기우뜸 기우뜸 성치 않은 무릎으로 식전마다 아파트탑돌이를 하셨던 것이다. 간절한 마음이 곧 기도라고 여긴 어머니는 당신 속내의?맺힌 것?을 위하여 마지막 남은 기름을 부어주려는 뜻이었다. 시에 인생을 엎어버린 나. 애면글면 초로에 접어든 나. 재미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살아온 나를 위하여?우리 딸 좋은 글 짓게 해주시고, 이름나게 해주시고…?일념으로 축원하셨다.

   시는 어머니와 나를 한 줄에 넘어뜨린 두억시니였다. 나는 입관하는 어머니의 발을 잡고 울었다. 사래 긴 논밭에서 무릎이 휘어버린 발. 기우뜸 기우뜸 걸으시던 발. 남모르는 해와 달 건너오신 발. 굽으신 그대로 굳어버린 발. 

   너무나도 가까웠던, 그래서 누군 줄도 몰랐던 어머니. 언제라도 뵈올 수 있었던, 그 많은 날들을 놓쳐버리고…. 영영 불러볼 수조차 없게 되어버린 어머니. 왜 한사코 글에만 목을 맸었단 말인가. 책상다리에 모조리 쓸어 넣은 내 인생을 어떻게 설명해야 된단 말인가. 꿈에서라도, 얼핏이라도, 뒷모습만이라도 보고 싶은 어머니. 내세는 정말 있는 것일까. 내세에서 어머니를 다시 만나면 금방 알아볼 수는 있을까. 그 옛날 모시적삼 다려 입으신 모습! 그 말씨, 그 얼굴 그대로일까.

 

   “어머님/당신이 떠나신지/오늘로 스무날 째…” 이 시를 발견할 무렵, 감동만을 섭취했던 오래 전 나는 이제 돋보기를 들여다보기에 이르렀다. 본질적 주제와 보편적 소재, 그리고 폭넓은 공감을 점한 ‘어머니의 우산’은 작가와 함께 독자가 건져 올린 진실일 것이다.

   “아버지 따위 베어 죽여라/어머니 따위 베어 죽여라/모두 베어 죽여라” 어머님 앞에 이런 칼을 날렸던 마루야마 가오루의 비탄은 어디로 흘러갔을까. 그는 어느 나라 사람이기보다 인간으로서의 양심을 괴로워했던 것이리라. 일본을 위해서도 우리를 위해서도 그의 출생은 필연이었던 것 같다. 그의 어머님께도, 우리민족을 탄압했던 이들에게도 명복을 빈다. 역사는 역사 안에서 시금석이 되고, 내일은 또 다른 역사를 향해 나아가야 하는 것. ‘어머니의 우산’ 을 읽게 해준 마루야마 가오루, ―그에게는 개인으로서의 감사를 따로 올린다. 자신의 피눈물이 없고서야 타인의 심금을 이토록 흔들 수는 없는 일이니 말이다. 

   후박나무 가지와 겨울햇빛이 유리창 가득히 들어온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만년필 끝에 선명한 그림자가 따라다닌다. 이 햇살과, 이 펜과, 이 앉은뱅이책상 하나면 내 삶은 배고프지 않노라고… 어머니의 탑돌이가 헛되지 않았노라고… 먼먼 곳으로 안부를 들고 떠난다. 가르마 한 솔기가 서늘한 기품이었던 우리 어머니! 지금쯤 무릎은 다 나으셨을까.

 

   *『애지』2004-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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