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인연
정숙자
우리는 흔히 숙명적 운명적 만남을 이야기한다. 그 숙명적 운명적 만남을 동시에 아우르는 말이 인연이다. 좀더 구체적으로 언급하자면 숙명은 인(因)이고, 운명은 연(緣)이다. 여기서 의미 분할을 더하면 숙명은 절대로 바꿀 수 없는 것, 절대로 피할 수 없는 것,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결정되어져 버린 것을 뜻한다. 즉 출생지, 부모형제, 성별 등이 그 범주다. 반면 운명은 변화가 가능한 기류이다. 친구, 연인, 이웃, 행복, 불행 등등 출생 이후의 모든 만남과 헤어짐이 그 계열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한 편의 시를 읽는 것도 인연이요, 한 사람을 만나고 헤어지는 것도 알 수 없는 곳으로부터의 인연이다. 숙명 앞에서는 의지가 무효이지만, 운명의 도움으로 우리는 보다 나은 내일을 꿈꾼다. 운명에 영향을 끼치지 않는 만남이란 없다. 미래로 불어간 바람 한 줄기, 또는 미분된 기억의 힘을 감지하지 못할 뿐이다.
Ⅰ. ―형님, 얘길 해도 괜찮우?
―괜찮고말고. 어차피 난 잠자지 못할 걸.
―몸이 근질근질해요.
―무슨 벌레라도 있는가보다.
―형님, 캄캄한 바깥에서 지금 난 긴
울음소리를 들었수?
―개가 짖는 게지.
―문 밖에 사람이 있는 것 같어.
―바람 소릴 게다.
―무슨 소리가 두 번 난 것 같어……
―그건 내리기 시작한 빗소리겠지.
―저 치는 듯한 소리가 들리지 않우?
―종소릴 게다.
―사람 죽었을 때 치는 종소릴까? 쇠망치 소릴까?
―글쎄.
―아이 무서워.
―나두.
―뇌성이 나지? 어떡허나?
―나도 모르겠다. 내 곁으로 오렴. 우리는 의가 좋지 않니?
Ⅱ. ―또 얘길 해도 괜찮우?
형님은 밤새도록 불이 켜 있을 때 일을 기억하고 있수?
―허지만 지금은 등불도 꺼져 버렸단다.
―그때도 우리는 무서웠지? 조금은……
―지금은 벌써 우리를 위로해 줄 사람도 없고……
이렇게 외로운 밤인데도 단 둘이 있지.
―엄마는 문짝 저 쪽에 계셨지.
때때로 속삭이는 낮은 목소리가 들렸어.
―허지만 지금은 벌써 엄마도 돌아가셨다.
―생각나우? 그 무렵 우리 사이는 그렇게 좋지 않었지?
―그렇지만 지금은 이렇게 의가 좋다……
―그렇지만 지금은 아무도 우리를 위로해 줄
사람이라곤 없지?
―우리가 하는 짓을 뭣이든
용서하는 사람도.
-고아 형제-
이 시를 지은 죠반니 파스콜리(Giovanni Pascoli 1855-1912)는 이탈리아 중북부 지방 산 마우로 디 로마냐에서 10남매 중 넷째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룻제로 파스콜리(Ruggero Pascoli)는 당시 한 귀족 영지의 관리자였고, 아내 카테리나 빈첸지 알록카텔리(Caterina Vincenzi Alloccatelli)와 함께 매우 평온하고 행복한 가정을 이루었다. 그러나 파스콜리의 나이 12살 때 괴한들의 총에 맞아 갑작스런 죽음을 맞이하였다. 사건 직후 경찰의 수사가 거듭되었으나 끝내 미궁에 그쳤다고 한다.
그러나 불행은 거기서 멈춘 게 아니었다. 누이와 어머니가 연거푸 세상을 떠났고 파스콜리는 결국 경제에 쫓겨 종교계 기숙학교를 그만두어야 했다. 뿐일까, 믿고 의지했던 맏형마저 몇 해가 못 되어 숨을 거두었다. 그런 소용돌이 가운데서도 파스콜리는 문과 고등학교를 거쳐 볼로냐(Bologna)대학 문학부에 입학하였다. 장학금으로 학업을 이을 수 있었던 그는 당대 이탈리아 최고의 문학가이며 교수였던 카르둣치(Carducci 1906년 이탈리아인 최초로 노벨 문학상 수상)의 강의에 지대한 관심을 기울였다.
대학을 졸업한 그는 여러 도시를 전전하며 고등학교에서 라틴어와 그리스어를 가르쳤다.
운명의 지지였을까. 그는 스승 카르둣치의 뒤를 이어 볼로냐 대학 문학교수가 되기에 이르렀다. 숙명적 상처를 극복한 그는 마침내 어린 두 여동생 이다(Ida)와 마리아(Maria)와 더불어 보금자리를 꾸렸다. 추억 속에 새겨진 가정의 포근함을 되찾으려던 시인의 꿈은 그러나 이다(Ida)의 결혼으로 무산되고 말았다.
그후 막내 동생 마리아와 시골 마을 카스텔벡키오로 이사하여 고독했지만 평온한 삶을 영위하였다. 그러나 뛰어난 문학가이자 교수였던 그는 47세를 일기로 짧은 생을 마감하였다. 마지막에 누이와 살았던 카스텔벡키오의 집 자리에는 지금도 그의 필사본들이 잘 보관되어 있으며, 그의 도서관도 있다고 한다. 한 편의 시 ‘고아 형제’를 통한 그와의 인연을 나는 소중히 간직하고 두고두고 되돌려 읽을 것이다.
우리의 일상에서 말과 글보다 쉽고 빈번한 인연은 없을 성싶다. 그러나 일단 격을 논하는 단계에 들어서면 말과 글보다 어렵고 힘든 상황 또한 없을 것 같다. 특히 시의 생산에 있어 완성도를 염려하지 않는다면 그보다 손쉬운 방출이 없을 것이며, 문자향서권기(文字香書卷氣)를 저울에 올리자면 그보다 더한 난항은 없으리라고 본다.
말은 신체 이외의 도구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하지만 시는 글자를 동원해야만 한다. 말은 의사의 교통수단이자 목적인 데 반해 시는 일방적 일회적 제의이며, 그 일방적 일회적 제의 안에서 이해와 감동의 폭을 확보해야만 한다. 그것이 정시(情詩)냐, 지시(知詩)냐를 떠나 이해와 감동의 파장을 함유했을 때 비로소 <시다움>의 반열에 오를 수 있다.
말(言)은 발음상의 말(馬)과도 비슷한 성질이 있다. 애정을 기울여 채찍질하고, 쓰다듬고, 인내하지 않으면 야성이 길들여지지 않는다. 표현코자 하는 내용을 개성적으로, 유연하게, 착오 없이 원고지에 이르게 하려면 필생의 분투를 쏟아 부어야 할지도 모른다. 펜촉이 헤엄쳐야 할 잉크는 지상의 어느 오지보다도 가파르고 메마르며 웅숭깊은 사파(裟婆)이니 말이다.
그러므로 <좋은 시>는 자신과의 전장에서 획득한 전리품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리라. 어찌 명예와 생명이 주어지지 않겠는가, 뒤에 오는 사람에게 빛이 되지 않겠는가. 시의 세계에 요행이란 있을 수 없다. 어느 날 <좋은 시>를 썼을지라도 노력이 이완된다면 준마와의 인연은 멀어지고 말 것이다. 파스콜리가 다루어낸 '고아 형제'는 말(言馬)에 대한 신뢰와, 삶에 대한 사랑과, 자신에 대한 편달을 증명하는 단초가 아닌가 한다.
빈부귀천을 떠나 생명이 부여된 개체들은 주어진 만큼의 인연을 접하고 돌아간다. 각기 다른 환경권에서 태어나고 자란 우리는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변화된 자신을 만난다. 같은 채석장에서 나온 돌이라 하더라도 어떤 덩어리는 예술작품이 되어 어엿한 위치를 차지하는가 하면, 어떤 모서리는 잘게 바수어져 길바닥에 깔리고, 또 어떤 쪽은 시퍼런 강물 위에 다리로 놓여 많은 이들에게 선을 베푼다. 돌이라는 숙명은 바뀌지 않지만 운명만큼은 무구한 시간 속에서 제2 제3의 모습을 드러낸다.
행이든 불행이든 우리 모두의 오늘은 그런 인연의 결과라고 본다. 신(神)이 천수천안을 가졌다한들 그중 단 한 개의 팔, 한 개의 눈도 우리 앞에 직접 드러내지 않는다. 누군가의 인연을 통해서만이 그 손길과 눈길이 전해진다. 그렇다면 나 자신을 포함한 개개인이 곧 신의 손이요, 눈이라는 견해가 크게 어긋나지 않을 터이다. 한 사람 한 사람을 대함에 있어 어찌 겸손과 친절을 결여할 수 있으리오.
어깨를 옹송그리고 문단 말석에 서 있는 나 자신도 적잖은 인연을 힘입어 지금에 이르렀다. 밖으로는 스승과 벗이 그들일 것이며, 안으로는 부모 형제가 그들이고, 더 크게는 자연이 보여준 모든 사물이 그들일 것이다. 그 가운데 소중하고 크지 않은 덕이 어디 있으리요, 마는 오늘은 나의 시 인생에서 부모님 외에 맨 먼저 빛을 던져주신 분의 이야기를 꺼낼까 한다. 그 분은 어느 먼 곳에서 날아온 천사가 아니라, 바로 나의 두 오라버니 중 작은오라버니이다.
나의 중학교 진학에 대해 부모님은 엄두를 내지 못했다. 어느 모로 톱아 보아도 값나가지 않는 셋째 딸인데다가 경제도 넉넉지 못한 농가였으니 이해가 요원한 일은 아니었다. 진학을 포기하는 쪽으로 결론이 내려질 무렵, 스물일곱 젊은 오빠가 모든 학비를 “내가 대겠다”고 낮은 어조로 선언하였다. 그날부터 열두 살짜리 꼬맹이의 인생은 새로운 틀을 잡았다. 초등학교도 그 오빠가 생일을 위조하여 여섯 살에 집어넣은 걸 보면 내 장래의 설계도가 이미 오라버니의 흉중에 있었던 게 아닌가싶다. 집 근처 학교가 있었음에도 굳이 기차 통학을 요하는 이리여자중학교에 원서를 넣었고, 시험 준비에 들어갔고 이듬해 봄 나는 교복을 입게 되었다.
내 합격통지서를 받아든 오빠의 밝은 표정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그때 오빠는 이리(지금의 익산) 모 개인병원에서 병리검사원 자리에 있었다. 아직 미혼이었고, 열심히 저축을 해야만 스스로의 미래를 기약할 수 있는 처지였음에도 나의 합격을 대견하게, 자랑스럽게만 여길 뿐이었다. 그리고 초회 수업료에서부터 매월 끊어야 하는 승차권, 교복, 학용품, 각종 준비물, 연필 한 자루, 잉크 한 병… 졸업비에 이르기까지 오빠의 주머니에서 내 손으로 건네어졌다.
꼬박 삼 년 동안, 나는 오빠한테 돈을 타러 가기도 했고 거스름돈을 돌려 드리려고 들르기도 했다. 오빠는 단 한 번도 ‘없다’거나 ‘다음에 주마’고 한 적이 없다. 동료에게 꾸어서라도 그 즉시 쥐어 주고는 겸연쩍고 미안한 웃음을 지어 보이곤 했다. 내 얼굴을 보는 것 자체가 돈이 묻어나가는 일이었는데도 오빠는 낯빛을 흐려본 적이 없다. 유복한 환경에서 공부를 한 사람이라면 나와 같은 꼬맹이의 감성 코드를 잘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 무거운 감사와 헤아릴 수 없는 죄송스러움을… 갚을 길 없는 은혜의 무량함을… 깡충깡충 뛰어 놀거나 까르르 웃어지지 않는 사유체계를… 존재에 대한 심사숙고를…
파스콜리의「고아 형제」는 카스텔벡키오 시절에 씌어졌다고 한다. 대화 형식의 이 시에서 남자로 표현된 동생은 마리아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누구를 막론하고 작금의 내가 있음은 무수한 인연을 여미었음이다. 그 모든 인연에 의해 내가 만들어지고 나 또한 타인을 이루는 바람결이다. 삶을 회고한 「고아 형제」역시 어릴 적 내 운명에 조용히 스며들었다.
오라버니는 내가 장차 의사(醫師)이기를 희망하였다. 나는 특별활동도 간호반을 지원했고, 의식의 태반을 그 방향으로 조절하였다. 그러나 나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유리창 너머로 흘러가는 구름에 정신을 빼앗겼다. 앉으나 서나 시만을 베끼고 외우고 혹은 지었다. 결국 전과목의 성적은 엉망이 되고 말았다. 그런 나에게 실망한 오빠는, ―모 상업여고의 문예장학생으로 입학할 수 있는 길을 터 주었다. 그런데도 나는 더 이상의 진학을 사양하고 일생동안 피 흘려야 할 운명과 손을 잡았다.
그리고(……) 40년이 지났다. 어리석은 꼬맹이가 선택한 40년은 400년 어치에 해당하는 고통과 고독, 고뇌를 수반하였다. 그 굴곡 속에서 나는 때때로 오라버니를 떠올렸다. 하늘 아래 어디서도 다시 경험할 수 없는 사랑! 그 무조건적인 헌신이 지금까지도 내 중심에 푸른 등불을 밝히고 있다. 이 서궤에서 오라버니께 몇 자 올리고 싶은 내 뜻을 독자는 해량하여 주기 바란다.
오빠//참으로 오랜만에 드리는 글월입니다. 노상 문자를 만지면서도 정작 오빠한테는 편지 한 통 올리지 아니했군요. 그러나 마음이 그런 건 아니었어요. 제가 쓰는 모든 시는 오빠의 작품이기도 하니까요. 오빠가 안 계셨다면 저는 지금 전혀 다른 삶 속에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시로 인해 오빠의 기대를 무너뜨렸지만, 저 자신 오랜 세월 고통스러웠지만 누군가 시계를 돌려놓고 다시 한 번 ‘살아 보아라’ 한다면 저는 역시 같은 길을 걸을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시는 돈이나 명예 권세가 되어주지 않지만, 아무 것도 되어주지 않는다는 그 점이 매혹입니다. 게다가 아무 것도 되어주지 않는 그것이 머리가 후끈거릴 정도로 어렵다는 게 끝없는 열망을 일으킵니다. 엊그제까지만 해도 저는 시 때문에 인생을 망쳤다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문득 관점이 바뀌었습니다. 실패의 기준을 바로잡은 것입니다.
시는 영혼의 산물이고 영혼의 기쁨을 소유할 뿐, 현실의 그 무엇과도 비교하거나 평가해서는 안 된다는 점입니다. 시로 인해 학업을 중단했던 제가 도중에 시를 그만두었다면 그것은 분명 실패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토록 좋아했던 시를 지금껏 보듬고 있지 않아요! 이 정의에 도달하기까지가 저에게는 연옥이었습니다. 이제는 어떤 충격도 저의 견고한 기쁨을 깨트리지 못합니다. 외로운 시인의 길은 험준하지만, 험준하다는 것이 불행을 의미하진 않습니다. 기꺼이 운명을 감당하는 자에게는 오히려 그 고난이 보람으로 이어지는 수맥이지요. 다만 수십 년이 지난 오늘 오라버님께 이 편지 한 통으로 마음을 표해야 하는 심경이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그렇지만 오빠는 시인의 오빠이니까 이 편지 한 통을 기뻐해 주시리라 믿습니다.
그리고 오빠. 고백할 말씀이 있습니다. 제가 오빠를 속이고 15원을 탄 일이 있어요. 학비 외에 돈을 달라고 해서는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떠돌이 장수가 파는 장식용 빨간 사과가 얼마나 예뻤던지… 친구 아버지가 돌아가셨다고, 조의금을 내야 된다고 했어요. 오빠는 한 점 의심도 없이 “그래, 안됐구나” 하시고는 돈을 주시기에 단숨에 날아가 그 빨간 사과를 손에 넣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다시 계획해 볼 수도 없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저는 오빠한테 늘 돈 달라기가 미안하고 죄송스러워 수학여행을 가겠다고는 한 번도 말씀드리지 않았어요. 매 학년 가을이면 수학여행 철이었지만 저는 ‘가고 싶다’는 마음조차도 먹지 않았었지요. 아예 여행길에 오른 친구들이 부럽지도 않았습니다. 남은 아이들은 등교하여 자습해야했는데 저는 그때도 시집을 베끼거나 읽거나 하였습니다. 여행에서 돌아온 친구들이 많은 이야기를 할 때도 저는 그저 담담했어요. 그런데 그 꼬맹이가 요즘 들어 불쌍한 생각이 듭니다. 그때 오빠한테 말씀 드렸더라면 틀림없이 보내주셨을 텐데요. 사실 그렇기 때문에 말씀드리지 않았었지만… 그것도 제가 잘못했지요? 오빠도 잘못하셨어요. 한 번만이라도 ‘없다’든지, ‘다음에 주마’든지, ‘무슨 돈을 그렇게 자주 달라느냐’든지 핀잔하셨다면 저는 수학여행도 보내달라고 보챘을 거예요.
오빠, ―죄송해요. 여태 못 드린 말씀,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려고 이 글을 시작했는데 죄송하다는 말씀밖에 나오질 않습니다. 너무 깊이 박힌 고마움은 말로 뿜어지지 않는가 봐요. 언젠가 꼭 갚아 드려야지 다짐했지만… 어느새 오빠는 예순일곱이 되셨고 저도 머리가 희어 버렸어요. 이 세상에서 갚을 수 없는 것이, 이 세상에서 받은 사랑인 줄을 알았습니다. 꼭 드리고 싶었던 감사하다는 말씀은 도로 접어서 간직하겠습니다. 왠지 그 말씀을 드리고 나면 제 마음이 허전해질 것 같아서요.
오빠. 시인은 글보다 먼저 마음을 아끼고, 이름보다도 먼저 마음을 아끼며, 몸보다도 더욱 마음을 아끼는 사람이에요. 오빠가 원하시던 의사는 육신을 치료해주는 사람이지만, 시인은 영혼을 어루만져주는 사람이니까 결국 저도 의사가 된 것이에요. 오빠도 저도 꿈을 이룬 것이에요. 오빠 오늘은 모처럼 행복해 해야겠어요. 한 번뿐인 인생에서 시를 선택한 것에 대해 저는 후회가 없어요. 바깥 세계가 적막했을 뿐, 시와 저는 항상 사이가 좋았어요. ‘고아 형제’처럼 시와 저는 늘 대화했어요. 어떻게 하면 말(言語)을 잘 부릴 수 있을까 궁리했고, 말이 조금씩 유순해질 때마다 즐거웠어요. 오빠, 우린 이미 오래 전에 위로와 용서로 감싸주실 부모님을 여읜 ‘고아 형제’예요. 부디 건강하세요. 부디 오래 오래 사셔야 해요. 오빠와 저와 시는 숙명과 운명을 함께 지닌 인연이었던가 봐요. 오빠, 오빠는 저의 시였어요. 제 시의 모든 영광은 오빠에게서 피어난, 오빠한테 바쳐드리는 꽃송이에요.//2004.7.1.13:57 숙자 올림.
*파스콜리에 대한, 상세한 자료를 보내주신 한국외국어대학교 <이상엽 교수님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파스콜리의 시집이 우리말로 소개될 날을 기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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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지』2004-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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