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시간
정숙자
序. 시(時)는 태양의 사원을 뜻한다. 간(間)은 문 안에 든 태양이다. 그러므로 시(時)는 낮에 해당하고 간(間)은 밤에 속한다. 우리는 모두 시간에 방류된 생명들이다. 낮과 밤이 순환/순연하는 가운데 자신의 오두막을 짓고, 문을 만들어 달고 그 안에서 자기만의 연보를 엮어나간다. 시간은 형상이 없음에도 개인과 다수의 관계에 얹혀 천차만별․천변만화한다. 태어남은 곧 시간의 열림이며, 누군가의 업적을 논하는 것은 그가 살고 간 시간을 답사하는 일이기도 할 것이다. 시간은 결코 부서지거나 낡지 않는다. 다만 시간 위에 쌓이는 발자국들이 오래됨과 새로움으로 표기되어질 뿐이다. 흐르는 게 강이 아니라 물인 것과 같이 우리 모두는 태양의 기슭을 지나가는 객이 아닌가. 이 엄연한 사실 앞에서 누군들 무심할 수 있을 것인가.
임께서 이 몸을 무한케 하셨나이다. 이것이 임의 기쁨, 연약한 이 그릇을 비우고 비우시와 항상 새로운 생명으로 채우시나이다.
이 가냘픈 한낱 갈대피리를 임은 산을 넘고 골짜기를 넘어 가져오시와 영원히 새로운 멜로디로 불어넣으셨나이다.
불사(不死)의 임의 손길이 닿자 이 가냘픈 가슴은 기쁨에 좁은 울이 터져 이루 형용할 수 없는 말을 하나이다.
임의 무궁한 선물은 극히 작은 이 손을 타고 오나이다. 세월은 흘러도 임께서는 끝없이 퍼붓건만 아직도 채울 곳은 남았나이다.
-기탄잘리․1-
詩聖. 이 시를 지은 타고르(Rabindranath Tagore 1861~1941)는 인도 캘커타의 명문가에서 태어났다. 부친 데벤드라나드(Debendranath)는 우상숭배에 빠진 힌두교를 개혁하고, 사회적 편견과 부패 제거에 힘썼을 뿐만 아니라 벵갈 문학의 기초를 세운 선구자였으며, 조부와 더불어 벵갈 르네상스의 지도자로서 국민에게 대성(大聖)으로까지 불리웠다고 한다.
그렇듯 빛나는 혈통과 예술의 향기, 전통적 분위기에 싸여 타고르의 재능은 마음껏 발휘/발화될 수 있었다. 그는 영국에 머무르기도 했고, 갠지스 강가 대자연 속에서 명상에 잠겼으며, 『사나다』라는 잡지를 만들어 거의 자기 혼자의 시․소설․희곡․평론 등을 실었다.
1913년 동양 최초의 노벨상 수상작 ‘기탄잘리’는 타고르 자신이 영역하였다. 예이츠가 서문을 썼고, 앙드레 지드가 프랑스어로 번역하였다. 그는 비단 문학뿐만 아니라 회화(繪畵)에서도 새 경지를 개척한 거장이요, 음악에 있어서도 수백 곡을 헤아리는 노래가 민족의 사랑을 받았다고 한다. 인도 국가(國歌)가 그의 작사․작곡이라는 것만으로도 증명이 될 법하다. 또한 그는 대학은 물론 각종 학교를 세우는 등 이론과 실천면에서도 위대한 교육가요, 식민지의 예속에서 벗어나고자 간절히 염원한 애국자였다.
노벨상을 탄 이듬해 영국 황실로부터 작위가 내려졌으나, 그로부터 4년 후 인도人 대학살을 목격하고는 그 작위를 반환하였다. 그는 위대한 철학자였고, 경국제세(經國濟世)의 뛰어난 정치가였으며, 나라에 공헌한 바가 이루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아 인도문화의 아버지였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당시 영국의 식민지였던 인도와 마찬가지로 일제치하에서 신음하는 우리 조선 청년들에게 두 편의 시 <동방의 등불/패자의 노래>를 남겨 위안과 희망을 심어주기도 했다.
리듬과 개성. 언어의 리듬은 개성을 수렴한다. 리듬은 정신과 성향의 표출이며 진로다. 어제의 리듬이 오늘에 이어지고, 오늘의 리듬이 내일을 지시한다. 그리고 이 연역과 귀납은 문맥의 토대이기도 하다. 리듬의 고저장단․완급의 조화가 작품 안에서 자리 잡을 때 작가의 개성은 구축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한 작가가 세워 가는 것은 작품이며 의미이지만, 그것은 결국 개성이다. 초유의 개성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끊임없는 문장체험과 어휘섭렵, 다각적 습작에 의해서만 근접이 가능하다. 유행적 글쓰기에 붓을 빠뜨린다면 고독한 글쓰기에서는 벗어날 수 있겠지만, 개성적 글쓰기에서는 멀어진다는 점을 염두에 새겨야 하리라. 사조(思潮)라고 하는 거대한 흐름에서 독자적인 개성을 드러내려면 사상적 확신과 신념, 의지가 마련되어야 한다. 외로움에 넘어지지 않을 각오가 선행되어야만 한다. 스스로 이론을 정립하고, 그 구조와 형태에 의한 작품을 생산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우선 그 독창에 도달하기도 어렵거니와, 생애를 건 실험정신이 따라야 함은 물론이다. 설령 그 궤적이 무모로 돌아간다 할지라도 최선에 대한 값은 유실되지 않을 것이다.
타고르를 말할 때 우리는 타고르의 리듬에 포위된다. 결코 간과할 수 없는 그의 개성은 음절, 음보, 음색 그리고 그만의 시간에서 익은 열매라고 본다. 현 시점에서의 우리 시, 나의 문학은 과연 어떤 것인가. 분석과 방향을 꼼꼼히 점검해야 할 것이다. 그에 대한 소급과 비전은 문단 전체의 몫이며 개인의 의무이기도 할 터이다.
책상다리. 앉은뱅이책상과 내 무릎 사이로 오랜 시간이 지나갔다. 일곱 살 때 읽었던 국어책에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책상이라고 부르는 이 밥상 위에서 나의 가갸거겨는 석회질이 되었다. 가로세로 각각 네 뼘에 불과한 이 밥상이 내 시와 산문의 텃밭이요, 대지였던 셈이다. 손님이 오면 다탁이 되어주기도 하는 이 밥상은 그러나 밥 한 그릇 바꿔 먹을 수 있는 원고료를 수확해 본 적이 없다. 그렇지만 밥이야 입으로만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가슴과 머리로도 흡수하는 양분이니 원고가 매매되지 않음을 탓할까보냐. 내 책상 위의 시간들은 나를 만년서생으로 인도해 주었으니 천수답일망정 옥토임이 분명하다.
그렇지만 행복은 늘 시기(猜忌)가 겨냥하는 타깃(target)인가. 몇 해 전 무릎 통증이 있어 M.R.I 촬영을 한 결과 연골이 찢어졌다는 것이다. 앉은뱅이책상이 문제였다. 앉은뱅이책상 앞에 앉을 때면 으레 책상다리를 하게 마련이다. 편지라도 여러 통 쓰는 날이면 아침부터 밤중까지 그 자세였을 뿐 아니라 독서와 봉투 만들기, 심지어는 그냥 앉아 있는 시간까지도 영덕대게가 무색할 정도로 다리를 접었던 것이다.
어쨌든 나는 영덕대게가 아닌 사람의 무릎이었기 때문에 매일 걸어야 하는 운명을 짊어졌다. 그것도 계단이나 비탈은 금물이고 평지만을 택해야 한다. 연골은 재생되지 않으므로 근육을 튼튼히 만들어야 한다는 의사선생님의 주석이다. 산책이라면 이전에도 즐기는 편이었지만 정해진 일과는 아니었다. 간혹 천천히 걸으며 읽기도 하고, 스치는 생각을 메모지에 적기도 하고, 그저 머리를 식히는데 목적이 있기도 했다. 그런데 그만 마칠 수 없는 숙제가 되어 버린 것이다.
비껴 걷기와 곧장 걷기. 산책을 나서야만 했던 첫날. 이런저런 상념에 잠겨 나는 여느 때보다도 느리게 발을 떼었던 것 같다. ―너무 이른데, 아직 무릎이 무너질 나이도 아닌데… 어린 시절 비누방울 내뿜으며 뛰놀던 무릎, 하이힐을 신고도 16분음표를 날리던 무릎, 시동을 건 버스일지라도 쫓아가 올라타던 무릎… 리듬을 놓친 것이다… 무릎과 함께 책상의 리듬이 와해되어 버린 것이다… 매일 두 시간의 반복은 독서와 작문에 적지 않은 손실을 가져올 것이다… 절반에도 미치지 못한 나의 노정이 장애를 만난 것이다… 하루에 24시간을 놓치고, 한 달에 30일을 놓치고, 일 년에 360일을 놓친다면 나는 그만큼 죽는 것이다… 나의 현실에서 하루 2시간은 24시간과 다름없는 공간인 것이다―
산책로 중간쯤에 이르렀을 때 맞은 편 저쪽에서 걸어오는 한 사람이 보였다. 그날따라 길 위에는 그 사람과 나 둘뿐이었다. 바로 그 순간 나는 내면에서 울리는 소리를 들었다. 그가 곧장 걸어갈 수 있도록 ‘네가 비껴 걸어라’는 것이었다.
고백하지만 그 날까지 나는 <비껴 걷기>와 <곧장 걷기>에 대하여 숙고해 본 적이 없었다. 그저 되는대로 비껴 걷거나 곧장 걸었다. 아니, 가능한 한 곧장 걸으려 했음을 자각하였다. 특히 책이라도 읽으며 걸을 때에는 남들이 비껴 걷는 것을 당연시하기까지 했다. 그런 마음가짐과 행위는 타인이나 자신이 감지할 수조차 없는 어리석음이었기 때문에 진정 오만이며, 유치이며, 부덕이었다. 무려 50년 동안이나 과오를 저지르고 있었던 것이다.
참회. 자신에게 무릎 꿇은 나는 맞은편의 그가 곧장 걸어갈 수 있도록 멀리서부터 완만한 선으로 비껴 걸었다. 그가 여자였는지 남자였는지도 기억할 수 없지만 그때 나는 매우 행복하였다. 참회에 가까운 등불이 마음을 비추었다. 멀어져 가는 그의 뒷모습이 나의 오랜 잘못을 지워주고 있었다.
리듬이란 그런 것이었던가. 파격에서 의외의 리듬이 생겨나고, 그 신생의 리듬은 결코 해롭지 않은 리듬이었던가. 무릎이 고장 나지 않았더라면 '비껴 걷기'에 대한 생각이 더 늦어졌을지도, 아주 깨우치지 못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 뉘우침은 부실한 내 무릎이 가져다 준 성찰이자 보폭이었다. 비워둔 시야와 마음에 내려진 신의 미소였다. 곰곰 생각해보니 지천명이면 비껴 걸을 줄도 알아야 되는 나이인 것이었다. 내가 비껴 걷지 않는 동안 많은 사람들이 비껴주었던 것이다. 더 읽고 더 써야 한다고 믿었던 시간과, 그에 따르지 못하는 불안/불만들은 이제 그만 내려놓아야 할 탐심인 것이었다. 다섯 수레의 책을 읽지 못했더라도, 도드라진 작품을 얻지 못했더라도 글 안에서 머리가 희어가는 삶이 얼마나 큰 광영이며 다행인가 말이다.
공연히 풀 가지 하나를 툭 꺾어 한들거리던 짓거리도 그날 반성하였다. 다시는 까닭 없이 당신의 어린것에게 손대지 않겠노라고 신 앞에 수결하였다. 그 날의 그 석양은 50년 동안의 내 삶에서 드물게 깊이 있는 시간이었다. 누구에게 펴 보일만한 것도, 손에 쥐어지는 무엇도 아니었지만 소리 없이 흐르는 격조였다. '신에게 바치는 송가'라는 뜻의 '기탄잘리'가 그 여운에 합류하였다. 고독과 고뇌를 고요로 삭인 이만이 부를 수 있는 노래 기탄잘리. 고독과 고뇌에 싸인 이에게 고요를 안겨주는 리듬 기탄잘리. 고독과 고뇌와 고요가 가장 고매한 개성으로 태양의 근원을 찬양한 기탄잘리!
퀼트. 시간으로 인한 시간의 위급에는 시간만이 수혈이다. 내가 시간을 떠나기 전에 시간이 나를 버리는 일은 산소가 사라지는 현상이다. 육체적 죽음만이 죽음의 갈래인 것은 아닐 것이다. 정신적 질식 또한 죽음이다. 나는 요즈음 읽은 책의 말미에도, 편지 끝에도, 메모지 한 장에도 꼬박 날짜와 시간을 사인한다. 내가 살아 있었던 시간을 기념해 두는 것이다. 경제가 절박한 사람이 늘 잔고를 확인하듯이 시간을 쓰다듬고 가중크린다. 시계는 여전히 오른쪽으로 돌아가지만 시간이 어디에 꼬리를 감추었는지 찾지 못하는 날들이 이어진다. 연골의 이상 말고도 시간의 소비가 예측을 불허하는 적자 상태이기 때문이다.
최근의 내 글들은 자투리 시간으로 깁고 맞추어낸 퀼트다. 그 연상 과정에서 나는 조각조각 덧대어 만든 잉어의 옷을 생각한다. 멀쩡한 곳이라곤 지느러미뿐! 그러나 그의 눈은 군자요, 그의 동작은 묵객화방의 오랜 벗이다. 이제 나도 시간 앞에서 경건해져야만 할 것 같다. 이 원고를 쓰는 데도 벌써 여러 날이 지나갔다. 나이 든다는 것은 가족에게, 이웃에게, 자신의 몸에게까지 시간을 내어놓는 일이었음을… 달라지는 생활리듬에 대처해 나가는 리듬 또한 문자화되지 않은 시행들이었음을…
시간을 기다리는 한 나는 살아 있다는 증거다. 읽던 시간이 생각하는 시간으로, 읊조리던 시간이 짓눌리는 시간으로 바뀌었다고 리듬이 꺾인 것은 아니다. 보도블록 틈서리에서 간신히 고개 내민 풀꽃을 본 적이 있다. 그 풀꽃의 아름다움이 후원의 모란화보다 덜하지 않음을 안다. 잎새가 남아 있는 한, 뿌리가 남아 있는 한 꽃과 열매도 남아 있는 것이다. 엄동에서 풀려난 후박나무가 봄물 머금은 가지들을 선명히 드러낸 아침, 나는 이제 또 행주치마를 입어야 한다. 타고르가 남겨 둔 여백에서 우리는 다시 새로운 리듬과 개성을 신에게, 책상에게, 자신의 시간에게 물어야 한다.
*『애지』2004-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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