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톳길
김지하(1941-2022, 81세)
황톳길에 선연한
핏자욱 핏자욱 따라
나는 간다 애비야
네가 죽었고
지금은 검고 해만 타는 곳
두 손엔 철삿줄
뜨거운 해가
땀과 눈물과 모밀밭을 태우는
총부리 칼날 아래 더위 속으로
나는 간다 애비야
네가 죽은 곳
부줏머리 갯가에 숭어가 뛸 때
가마니 속에서 네가 죽은 곳
밤마다 오포산에 불이 오를 때
울타리 탱자도 서슬 푸른 속니파리
뻗시디 뻗신 성장처럼 억세인
황토에 대낮 빛나던 그날
그날의 만세라도 부르랴
노래라도 부르랴
대숲에 대가 성긴 동그만 화당골
우물마다 십 년마다 피가 솟아도
아아 척박한 식민지에 태어나
총칼 아래 쓰러져 간 나의 애비야
어이 죽순에 괴는 물방울
수정처럼 맑은 오월을 모르리 모르리마는
작은 꼬막마저 아사하는
길고 잔인한 여름
하늘도 없는 폭정의 뜨거운 여름이었다
끝끝내
조국의 모든 세울은 황톳길은
우리들의 희망은
낡은 짝배들 햇볕에 바스라진
뻘길을 지나면 다시 메밀밭
희디흰 고랑 너머
청천 드높은 하늘에 갈리던
아아 그날의 만세는 십 년을 지나
철삿줄 파고드는 살결에 숨결 속에
너의 목소리를 느끼며 흐느끼며
나는 간다 애비야
네가 죽은 곳
부줏머리 갯가에 숭어가 뛸 때
가마니 속에서 네가 죽은 곳.
-전문-
▶민중 변혁 운동의 전통과 우주 생명의 지평/김지하의 시 세계와 동학사상을 중심으로 (부분)_홍용희/ 문학평론가
김지하는 4·19 세대 문학의 전위에서 민족 민중 변혁 운동의 전통을 현재적으로 계승한 대표적인 시인이다. 그는 4·19혁명을 전통적인 민중 변혁 운동의 역사와 세계관의 연속성 속에서 인식하고 이를 구체적인 미학으로 형상화하였다.
(···略···)
이 시는 시인의 시적 소명이 '아버지 찾기 아버지와 하나 되기'에서 출발하고 있음을 집약적으로 보여 준다. 시적 화자는 "길고 잔인한" "폭정의 뜨거운 여름" 속에 있다.그곳은 "작은 꼬막"이 아사하고, "낡은 짝배들"이 바스라지고, "모밀밭"이 메말라 "희디흰 고랑"을 드러내는 죽임의 땅이다. 이러한 절박한 상황에서 그는 "애비"가 죽은 곳으로 향해 있는 "황톳길"을 떨쳐나선다. "너의 목소리를 느끼며 흐느끼며/ 나는 간다 애비야/ 네가 죽은 곳" 시적 화자에게 "애비"는 삶의 좌표이며 지향점이다. 이 시의 중심부를 가로지르는 "나는 간다"의 반복은 "애비"를 향한 화자의 직선적 행보의 속도감을 배가시킨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애비"의 실체는 무엇인가? 그것은 "척박한 식민지에 태어나/ 총칼 아래 쓰러져 간 나의 애비야"에서 암시되듯 압제와 외세를 향해 싸웠던 이 땅의 민족적 민중 항쟁의 주체이다. 따라서 그가 황톳길을 떨려나선 행보는 "애비"가 저항하던 척박한 역사 현실과 "지금은 검고 해만 타는 곳" "하늘도 폭정의 뜨거운 여름"으로 표상되는 오늘날의 시대상이 근원 동일성지닌다는 인식과 아울러 민족 민중혁명 운동의 현재적 계승의 으미를 지닌다. 그럼, 이때 민족 민중혁명 운동의 가장 핵심적인 위치에 놓이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갑오동학농민혁명의 사상과 지향성이다. (p. 시 38-40/ 론 68 (略) 71)
---------------------
* 『시작』 2022-가을(81)호 <특집 2/ 김지하 시인 추모 특집/ 김지하 대표시/ 10편> 中
* 김지하/ 1941년 전남 목포 출생, 1961년 대일굴욕외교 반대투쟁에 가담-첫 옥고를 치름, 1966년 서울대 미학과 졸업, 1969년 『시인詩人』 誌에 「황톳길」등 5편 발표하며 등단, 시집『황토』『타는 목마름으로』『남南』『살림』『애린 1, 2』『검은 산 하얀 방』『이 가문 날에 비구름』『나의 어머니』『별밭을 우러르며』『중심의 괴로움』『화개』『유목과 은둔』『비단길』『새벽강』『못난 시김새』, 저서『밥』『남녘땅 뱃노래』『흰 그늘의 길 1, 2, 3』『생명학 1, 2』『김지하의 화두』『탈춤의 민족미학』『생명과 평화의 길』『디지털 생태학』『오적』등이 있음// 아시아·아프리카 작가회의 로터스 특별상, 국제시인회의 위대한 시인상, 국제시인회의 위대한시인상, 크라이스키 인권상, 이산문학상, 정지용문학상, 만해문학상, 대산문학상, 공초문학상, 영랑시문학상, 청마문학상 등 수상, 2022년 작고.
*홍용희/ 1966년 경북 안동 출생, 1995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평론 부문 등단, 저서『김지하 문학연구』『한국문화와 예술적 상상력』, 평론집『꽃과 어둠의 산조』『아름다운 결핍의 신화』『대지의 문법과 시적 상상』『현대시의 정신과 감각』 『고요한 중심을 찾아서』등
'잡지에서 읽은 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목련 정원/ 곽효환 (0) | 2024.05.15 |
---|---|
그 겨울은 없다/ 원탁희 (0) | 2024.05.14 |
문상/ 이재무 (0) | 2024.05.14 |
김성희_미니멀라이프, 버리고 갈 것만 남은···(부분)/ 참새들의 수다 : 이길원 (0) | 2024.05.10 |
황정산_ 자신의 목소리를 다시 찾다(부분)/ 아프다 : 서철수 (0) | 2024.05.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