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에서 읽은 시

황치복_개성적인 작시술, 혹은···(발췌)/ 녹슨 천사의 트럼펫 : 김정범

검지 정숙자 2024. 4. 4. 01:29

 

    녹슨 천사의 트럼펫

 

     김정범

 

 

  어느 행성의 버려진 공포인가

  푸르른 향기는 지워졌다

 

  붉은 숲에 바람이 일고, 빛에 그을린 삭정이가 어지럽게 떨어진다 귀가 잘린 잿빛 고양이는 가시덤불에 몸을 숨기고, 굶주린 늑대의 꼬리에서 파란 가루가 번득인다

 

  찢어진 눈으로 짐승을 쫓고 있는 팔 없는 인형

  하늘에서 녹슨 천사가 트럼펫을 들고

  어둠을 벗기며 음관을 연다

 

  하늘의 스테인드글라스가 갈라졌네

  깨진 조각이 얼굴에 박히고 방열판이 녹아내렸네

  허공에서 신의 말이 번쩍거렸네

  램프의 빛을 따라 실험지가 흩날리고

  해골 구름이 입을 열었네

  우리가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지?

 

  숲을 적시는 이지러진 소리

  방사선의 밤 위로 연둣빛 야광 음이 흐른다

 

  그녀는 옷을 벗는다

  자라난 발톱이 흙에 뿌리를 내리고, 머리카락이 하늘로 수직의 안테나를 세운다 피부 껍질이 벗겨져도 그렇게 서 있을 것이다 행성의 모세혈관을 따라 푸른 혈구는 다시 흘러갈 것이다

 

  유령마저 사라진 프리피야트

  차오르는 적막을 향해 트럼펫을 불고 있는

  돌무덤 위의 녹슨 철상

 

  전율하는 몸의 가지를 타고 트럼펫 소리가 지구 위로 퍼진다

  신생대의 박테리아가 유성에 섞여 쏟아져 내린다

      -전문-

 

  ▶개성적인 작시술, 혹은 지구인으로 살아간다는 것(발췌)/ 김정범 시집 『병 속의 고양이』(2023, 시문학사)의 시세계를 중심으로_ 황치복/문학평론가       

  "어느 행성의 버러진 공포인가/ 푸르른 향기는 지워졌다"는 시의 서두가 앞으로 전개될 시상의 흐름과 시적 테마를 암시히고  있다. 앞으로 일어날 사건은 지구 행성의 차원에서 벌어진 공포스러운 것이라는 점, 그리고 "푸르른 향기"라는 생명적 가치를 앗아간 박탈적 사건이라는 점을 암시하고 있는 셈이다. 그 사건이란 "유령마저 사라진 프리피야트"라는 그절에 암시되어 있는데, 우크라이나 북부 키이우주에 있는 도시로서 5만 명에 가까운 인구가 거주했으나 체르노빌 원전 사고 이후 사람들이 모두 떠나 유령도시가 되어버린 프리피야트 도시를 호명함으로써 원전 사고의 재앙을 환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행성 차원의 공포로서 체르노빌 원전 사고의 파급 효과를 강조하기 위해서 시인은 다양한 그로테스크한 이미지들을 동원하고 있는데, "빛에 그을린 삭정이"를 비롯하여 "귀가 잘린 잿빛 고양이", 그리고 "꼬리에서 파란 가루가 번득이"는 "굶주린 늑대"의 이미지들이 바로 그것들이다. 또한 "찢어진 눈으로 짐승을 쫓고 있는 팔 없는 인형"이라든가, "해골 구름", 그리고 "방사선의 밤 위로" 흐르는 "연둣빛 야광 음" 등의 불길하고 괴괴한 정동을 자극하는 다양한 이미지들이 원전 사고로 인해 지구 행성이 겪고 있는 불안과 공포를 극대화하고  있다.

  가장 주목되는 이미지는 제목에 제시되어 있는 "녹슨 천사의 트럼펫" 소리이다. 그것은 "어둠을 벗기고 음관을 열"어서 음악을 연주하는데, 그 음악은 "우리가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지"라는 독백과 함께 "방사선의 밤 위로 연둣빛 야광 음"으로 흐른다. 또한 그것은 "차오르는 적막을 향해" 불리워지고 있으며, "전율하는 몸의 가지를 타고" "지구 위로 퍼지"고 있기도 하다. 그러니까 "녹슨 천사의 트럼펫" 소리는 인류 멸종의 서막이자 애도의 음악으로서 불길한 미래를 예고하면서 회한과 공포의 정동을 파동치게 하면서 울리고 있는 셈이다. 그것은 마치 북유럽 신화에서 신들의 종말이라는 라그나로크가 다가올 때, 죽은 자의 세계를 지키는 가름이라는 괴물 개가 벼랑 끝에서 사형을 알리는 나팔 소리처럼 큰 입을 벌리고 짖는 울부짖음과 같은 소리로 울리고 있다. 신화에서는 가름의 울부짖음이 있은 후 땅이 세차게 흔들리면서 바위와 나무가 부서지고 바다에서는 해일이 일어나 육지를 덮치고 해안 도시가 초토화된다.

  시인은 이러한 녹슨 천사의 트럼펫 소리가 지구 위로 울려 퍼지면, "신생대의 박테리아가 유성에 섞여 쏟아져 내린다"라고 묵시록적인 예언을 하고 있는데, 이러한 표현은 원전 사고와 같은 행성 차원의 비극은 인간을 신생대 인류 발생의 초기로 되돌릴 수도 있음을 암시한다. (p. 시 34-36/ 론 36-37)

 

  ---------------------

  * 반년간 『미당문학』 2024-상반기(17)호 <특집 1> 에서

  * 김정범/ 충북 청주 출생, 2019년 ⟪한국 NGO 신문⟫ 신춘문예 당선 & 『시문학』으로 등단, 시집『병 속의 고양이』

  * 황치복/ 1996동아일보신춘문예 문학평론 부문 당선, 2020열린시학』으로 시조 부문 신인상 수상, 저서『동아시아 근대 문학사상의 비교 연구』『현대시조의 폭과 깊이』『젊은 시인들의 새로운 시선』외,역서『나츠메 소세키 문명론』『나츠메 소세키 문학예술론』, 현)한경대 외래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