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화집에서 읽은 시

아름다움이 우리를 멸시한다/ 정혜영

검지 정숙자 2024. 3. 23. 01:32

 

    아름다움이 우리를 멸시한다*

         레이크 루이스*

 

     정혜영

 

어떤

광경 앞

언어는 사라지고

아무것도

 

극에서 극으로 향하는 신전의

 

지붕처럼

 

  되풀이되는

  한여름밤

 

  악몽에 갇힌 것 같아

 

  루이스,

  추앙받아 마땅할 아름다움

 

  사람들은

  그녀의 이름을 호수에게 주었다

  아담이 그녀의 이름을 불러주듯이

 

  우리의 언어가

  아름다움이 얼어붙는다면

 

  멀리

 

  달아나야 하리라

  허공에 음표를 매다는 카프카

 

  미완의 문장처럼

  들끓는

  불안처럼

 

  만년설로 뒤덮인

  설산 봉우리들

 

  순수한

 

  것들은

  제 체온에 놀라 불붙는 수은주가 된다

 

 빅토리아 빙원과

  에메랄드 호수

 

  서로에게

 

  귀 기울여 저 먼 곳을

  향하는 경사면이

  되었다

 

 신전은 비어있고

 

  루이스, 그녀는 호수에 갇힌 눈물이 되었다

  아니,

  호수는 루이스의 눈망울이 되었다

 

  우리가 아름다움에 눈이 멀어

 

  캄캄한

  영원,

 

  투명한 바닥이 보이지 않는다

    -전문(p. 28-30)

 

   * 릴케의 시 「두이노의 비가」에서 인용

   ** Lake Louse 캐나다 앨버타주 소재 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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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정시학회 『미래 서정』(제12호) 에서/ 2023. 12. 29. <서정시학> 펴냄

  * 정혜영/ 2006『서정시학』 겨울호 신인상, 시집『이혼을 결심하는 저녁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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