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문장을 끝내지 못한 곳에서
김안
망각이 용서를 낳는다고 했던가, 그 용서가 영혼을 병들게 만든다고 했던가. 딸아이와 함께 나온 초저녁 산책길에 본, 죽은 나무 그늘 아래 죽은 잿빛 비둘기와, 죽은 새끼 고양이와, 이미 죽어 있던 것들, 갓 죽은 것들. 울던 딸아이를 달래 그네에 태우고 힘껏 밀다 보면 집집마다 뿌옇게 등 켜지고, 딸아이는 죽은 풍경을 잊고, 그네를 타며 작고 둥근 머리를 치켜들고 제 집이 몇 층인지 헤아리고, 그렇게 높고 가파르게 적재된 가정들 틈에서 나는 선한 의지와 땅과 몸, 얕고 서글픈 역사, 눈 밖에 있는 자들 등만을 딴에 멋지게만 기억하려 하겠지. 어쩔 수 없는 걸까. 과연 그럴까? 그럴 수밖에······ 이 문장을 끝내지 못한 곳에서, 이렇게 함께 너와 느릿느릿 춤추다 어리석게 늙어가면 좋겠다만, 나의 무능과 실패로 짠 지옥이 자칫 네게 시작될 것만 같아서. 차마 이 부끄러움 속을 너와 함께 걸을 수 없어서.
-전문-
해설> 한 문장: 딸과 함께 나온 산책길에 시인은 수많은 죽음을 목격한다. 잿빛 비둘기와 새끼 고양이. 그는 이 죽음을 제대로 기록할 수 없는 자신의 한계에 고통스러워한다. 바로 그 때문에 시인은 죽음 그 자체에 사로잡히고 만다. 완성되지 못한 자신의 문장 안에 갇히고 마는 것이다. 시인이 차마 끝내지 못한 이 문장을 완성하는 이는, 놀랍게도 그의 딸이다.
이 시에서 아이는 시인과 마찬가지로 수많은 죽음의 또 다른 목격자이다. 그러나 죽음으로부터 일상으로 되돌아오는 그 과정에 있어서는 완전한 차이를 보인다. 아이는 죽음을 두려워하지만, 그것에 휘말리지 않기 때문이다. 죽음과 일상의 거리를, 그 미묘한 간극을 결코 놓치지 않는 것이다. 그 힘은 어디에서 기인하는 것일까?
죽음의 순간 앞에서도 수많은 수사修辭와 비유 안에 갇혀 있던 시인과 달리, 아이는 아무런 여과 없이 온전히 그 죽음에 공감했다. 그리하여 시인이 완성되지 못한 문장 안에 갇혀 있는 동안, 아이는 이미 자신만의 문장을 완성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시인은 이러한 아이를 통해 '파산된 노래'가 복원될 수 있는 가능성을 엿본다. 기록에 대한 강박을 벗어나, 보이고 느끼는 그대로를 문장으로 만들어내는 힘, 그 진실의 언어. 그것이야말로 파산된 언어를 회복하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사실 말이다. (p. 시 74/ 론 115-116) <류수연/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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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집 『Mazeppa』에서/ 2024. 2. 23. <문학과지성사> 펴냄
* 김안/ 1977년 서울 출생, 2004년『현대시』로 등단, 시집『오빠생각』『미제레레』『아무는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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