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에서 읽은 시

티셔츠를 벗다가/ 이영옥

검지 정숙자 2024. 3. 3. 23:53

 

    티셔츠를 벗다가

 

     이영옥

 

 

  목 좁은 티셔츠를 벗다가 셔츠에 갇혔다

  셔츠는 아랫도리를 흔들며 먹이를 놓치지 않을 기세다

  겨우 벗어 탁자에 던져둔 셔츠를 보니

  탈피를 못해 죽은 뱀 같다

 

  외피가 내피에게 자리를 내주지 않으면 뱀은 죽고 말아

  몸을 내보내지 못한 가죽은 조마조마했을 거야

  뱀이 삶을 포기하려 했을 때 뱀보다 더 무서웠을 거야

 

  허물을 벗다가 포기한 뱀은 자신이 죽을 자리를 찾아간다

  산에서 어딘가로 기어가고 있는 뱀 허물을 보았다

  너는 너로부터 잘 달아났구나!

 

  눈물로 반성하며 허물을 벗고

  다른 허물을 찾아가는 나여

 

  아침에 벗은 허물이 저녁이면 귀신같이 몸을 찾는다

     -전문(p. 107)

   -------------------

  * 『시로여는세상』 2022-봄(81)호 <신작시> 에서

  * 윤진화/ 2005년 ⟪동아일보⟫로 등단, 시집『사라진 입들』『누구도 울게 하지 못한다』

'잡지에서 읽은 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왜/ 이용헌  (0) 2024.03.04
4시 20분/ 정선  (0) 2024.03.04
서울역 7017, 휘파람을 부세요/ 윤진화  (0) 2024.03.03
두 밤/ 이계열  (0) 2024.03.03
낙타의 문장/ 이학성  (0) 2024.03.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