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셔츠를 벗다가
이영옥
목 좁은 티셔츠를 벗다가 셔츠에 갇혔다
셔츠는 아랫도리를 흔들며 먹이를 놓치지 않을 기세다
겨우 벗어 탁자에 던져둔 셔츠를 보니
탈피를 못해 죽은 뱀 같다
외피가 내피에게 자리를 내주지 않으면 뱀은 죽고 말아
몸을 내보내지 못한 가죽은 조마조마했을 거야
뱀이 삶을 포기하려 했을 때 뱀보다 더 무서웠을 거야
허물을 벗다가 포기한 뱀은 자신이 죽을 자리를 찾아간다
산에서 어딘가로 기어가고 있는 뱀 허물을 보았다
너는 너로부터 잘 달아났구나!
눈물로 반성하며 허물을 벗고
다른 허물을 찾아가는 나여
아침에 벗은 허물이 저녁이면 귀신같이 몸을 찾는다
-전문(p. 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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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로여는세상』 2022-봄(81)호 <신작시> 에서
* 윤진화/ 2005년 ⟪동아일보⟫로 등단, 시집『사라진 입들』『누구도 울게 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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