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에서 읽은 시

4시 20분/ 정선

검지 정숙자 2024. 3. 4. 00:08

 

    4시 20분

 

    정선

 

 

  데면데면한 봄이 왔다

 

  못 견디는 시간이 있다

 

  지루했다

 

  놀이터를 바꿨다

 

  둥근 것은 부드러이 스며들었다

 

  총탄 속에서도 염소 새끼가 태어났다

 

  사람은 많은데 사람이 없었다

 

  새벽 4시 20분 철로에는 다정한 고래가 살았다

 

  아이들은 흰긴수염고래게임* 속으로 스며들었다

 

  고래와 따뜻한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팔목에 고래를 그려서라도 고래가 되고 싶었다

 

  마치 바닷물을 빨아들여 물고기를 걸러 먹듯

 

  흰긴수염고래는 아이들을 삼켰다

 

  마침내 모두 고래가 되었다

 

  새벽 4시 20분은

  커다란 배가 가라앉기 전까지 발버둥 치는 시간

 

  새벽 4시 20분은

  불면인 내게 취약한 미필적 고혹의 시간

 

  새벽 4시 20분을 베고 누웠다

 

  수직으로 긴 숨을 내뿜는 하얀 고래의 길이 환했다

 

  세상의 슬픈 목소리들은 사방에서 그치지 않았다

 

  또 다른 봄은 검은 자두의 표정을 지었다

 

  지친 내가 지친 나를 보듬어 주었다

 

  바다가 둥글게 열렸다

    -전문(p. 115-117)

 

   * 러시아 청소년 130명을 극단적 사망으로 이끈 sns게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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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로여는세상』 2022-봄(81)호 <신작시> 에서

  * 정선/ 2006년『작가세계』로 등단, 시집『안부를 묻는 밤이 있었다』『마추픽추에서 띄우는 엽서』, 에세이집『내 몸속에는 서랍이 달그락거린다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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