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법무아諸法無我
진서윤
그림자는 빛과 함께 태어났다가 어둠에 멸합니다
남은 잔을 비우고 일어서야 해요 이마에 땀이 난다는 건 어쨌든 아직 통증이 남아 있다는 것, 각자 숙제가 있으니까 그렇게 살라고 혼미한 음성을 보냅니다 참 독특한데 흩어지는 소리, 호명은 난청을 부르지요
아웃사이드의 이점은 그의, 그들의 눈 밖에 있어도 잃을 게 없다는 것 다만 추측이 가라앉고, 좀 덜 가렵기를 바라요 그럼에도 암담하다고 말하는 건 농담인 것 같아요 싫은 게 아니라 그들은 듣는 이들만큼 신중하진 않아요
이별에 암순응이 필요할까요? 그냥 흘려보내는 감정에 실린 편도체를 자극하는 거겠지요 9시 30분 이제 당신이 떠날 시간이네요 내가 떠나든가, 별 사이가 아니란 게 별스럽게 자유를 주는 밤이네요
여기까지가 인연입니다
-전문-
해설> 한 문장: 이 시집이 빛을 예민하게 감지하고 그것들이 맞이하는 소멸과 그에 따른 애수를 담고 있음은 서두에서 언급한 바 있다. 「제법무아諸法無我」는 빛과 함께 태어났다가 어둠에 멸하는 그림자의 그림자다움을 그냥 받아들인다. 어둠에 멸하는 순간에는 "통증이 남아 있"더라도 "남은 잔을 비우고 일어서야" 한다고, 아웃사이드의 이점은 "그의, 눈 밖에 있어도 잃을 게 없다는 것" 달리 말하면 관계와 욕망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자신다움'을 받아들이면 "듣는 이들만큼 신중하지 않"은 "그들" 때문에 상처받을 일은 없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시인은 묻는다. "이별에 암순응이 필요할까요?" 인간에게 주어진 하루의 시간 8만6천400초 중 "9시 09분"은 이제 당신이 떠나든지 내가 떠나든지 하는 "여기까지가 인연"인 순간이 된다. "별 사이가 아니란 게 별스럽게 자유를 주는 밤"으로 흘려 보낼 수 있는 것이다.
이렇듯 건조하고 간결하게 관계를 정리하는 「제법무아諸法無我」가 눈물을 흘리며 붙잡는 연인의 모습보다 더 슬프게 와닿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는 실제로 '제법무아'를 실천하고 살 수 있는 사람이 많지 않음을 알기 때문이다. (p. 시 41/ 론 126-127) <장예원/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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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첫 시집 『여기까지가 인연입니다』에서/ 2024. 1. 10. <문학의 전당> 펴냄
* 진서윤/ 경남 함안 출생, 2013년 ⟪경남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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