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에서 읽은 시

회랑 외 1편/ 박영기

검지 정숙자 2024. 1. 14. 01:56

 

    회랑 외 1편

 

     박영기

 

 

  지친 나비는

  그대로 쉬게 두고

  우리

  조금 더 빨리 걸어요

  저쪽 모퉁이를 돌면

  다시 태어날 수

  있어요

  다시 죽을 수도

  있어요

  나비가

  당신의 어깨에서 날아오르는

  순간

  우리는 지금의 우리를 잊어버리고

  서로 마주 보고

  댁은 누구신지?
  어깨 위 나비 날개 비늘 쓸어 주며

  모르는 당신과 함께 걷다

  걷다 걷다가 보면

  알게 돼요

  몇 번이고

  다시

  모르게 돼요

  우리

  조금 더 속도를 내요

     -전문(p. 70-71)

 

 

     -----------

      흰 것

 

 

  흰 것에 대하여 울지 않고 말하기

  그녀는 제목만 써 놓고

  

  시시해, 시 같은 건,

  쓰지 않는다 소설을 쓴다

  흰 것에 대하여

 

  화구에서 막 꺼내

  부서지기 직전

  뜨거운

 

  모든 흰 것에 대하여

 

  쓰지 않을 때

  시간이 멈춘다

  계절이 사라진다

  잇따라 얼어붙은 눈만 내린다

 

  흰 손수건 위에 흰 발자국

  흰 발자국 뒤에 흰 발자국

 

  처음처럼 모든 끝처럼

  

  흰 것은 끝까지 흴

  죽어도 흴 것

  검어도 흴 것

 

  흰 것에 대하여

  혀에 땀이 나도록 쓰고 또

 

  쓸 것

    (p. 4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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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집 『흰 것』에서/ 2023. 11. 10. <파란> 펴냄

  * 박영기/ 경남 하동 출생, 2007년『시와사상』으로 등단, 시집『딴전을 피우는 일곱 마리 민달팽이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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