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랑 외 1편
박영기
지친 나비는
그대로 쉬게 두고
우리
조금 더 빨리 걸어요
저쪽 모퉁이를 돌면
다시 태어날 수
있어요
다시 죽을 수도
있어요
나비가
당신의 어깨에서 날아오르는
순간
우리는 지금의 우리를 잊어버리고
서로 마주 보고
댁은 누구신지?
어깨 위 나비 날개 비늘 쓸어 주며
모르는 당신과 함께 걷다
걷다 걷다가 보면
알게 돼요
몇 번이고
다시
모르게 돼요
우리
조금 더 속도를 내요
-전문(p. 70-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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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 것
흰 것에 대하여 울지 않고 말하기
그녀는 제목만 써 놓고
시시해, 시 같은 건,
쓰지 않는다 소설을 쓴다
흰 것에 대하여
화구에서 막 꺼내
부서지기 직전
뜨거운
모든 흰 것에 대하여
쓰지 않을 때
시간이 멈춘다
계절이 사라진다
잇따라 얼어붙은 눈만 내린다
흰 손수건 위에 흰 발자국
흰 발자국 뒤에 흰 발자국
처음처럼 모든 끝처럼
흰 것은 끝까지 흴 것
죽어도 흴 것
검어도 흴 것
흰 것에 대하여
혀에 땀이 나도록 쓰고 또
쓸 것
(p. 4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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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집 『흰 것』에서/ 2023. 11. 10. <파란> 펴냄
* 박영기/ 경남 하동 출생, 2007년『시와사상』으로 등단, 시집『딴전을 피우는 일곱 마리 민달팽이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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