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풍 속으로
고주희
네가 쓴 글을 고쳐 읽고 있다
불어 닥친 북풍은 모든 나무의 가지를 한 방향으로만 뻗게 한다
맹그로브 나무처럼 염분으로 버틴 뿌리들의 시간
빗물에 씻긴 돌의 표정은 먼 데서 온다
저 돌은 한때를 짓누르던 밤
비스킷이 구워지는 오븐과 낮잠 사이에는
뿌리가 뒤집힐만한 비문이 종종,
찻물 온도가 적당히 식어 갈 때쯤
준비된 먹구름이 무서운 속도로 몰려오곤 한다
숲 속의 일몰은 때때로 야만적이다
아직 내게 일어나지 않은 운 나쁜 일들이 구획 없이 흘러간다
없는 애인들을 불러들인다
어떻게든 번개는 치고 불은 빠져나가야 하므로
지금은 속살이 까만 나무의 계절
찻잔에 가라앉은 찌꺼기와 유예되는 뒷모습 사이
안녕이란 말에는 얼마간의 재가 뒤섞여있다
더 이상 떠오르지 않아 얼굴은
다시 시작되는 폭풍인지 이렇게 시작되는 빈 들판인지
없는 뺨을 할퀴며
내가 쓴 글을 네가 고쳐 읽는다
-전문(p. 169-170)// 『다층』 2018-가을(79)호 수록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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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층』 2023-겨울(100)호 <다층, 지령 100호 특집 시-100> 에서
* 고주희/ 2015년『시와표현』으로 등단, 시집『우리가 견딘 모든 것들이 사랑이라면』『시골시인-J』(공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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