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에서 읽은 시

폭풍 속으로/ 고주희

검지 정숙자 2024. 1. 14. 19:05

 

    폭풍 속으로

 

     고주희

 

 

  네가 쓴 글을 고쳐 읽고 있다

 

  불어 닥친 북풍은 모든 나무의 가지를 한 방향으로만 뻗게 한다

  맹그로브 나무처럼 염분으로 버틴 뿌리들의 시간

  빗물에 씻긴 돌의 표정은 먼 데서 온다

 

  저 돌은 한때를 짓누르던 밤

 

  비스킷이 구워지는 오븐과 낮잠 사이에는

  뿌리가 뒤집힐만한 비문이 종종,

  찻물 온도가 적당히 식어 갈 때쯤 

  준비된 먹구름이 무서운 속도로 몰려오곤 한다

 

  숲 속의 일몰은 때때로 야만적이다

 

  아직 내게 일어나지 않은 운 나쁜 일들이 구획 없이 흘러간다

  없는 애인들을 불러들인다

  어떻게든 번개는 치고 불은 빠져나가야 하므로

 

  지금은 속살이 까만 나무의 계절

  찻잔에 가라앉은 찌꺼기와 유예되는 뒷모습 사이

  안녕이란 말에는 얼마간의 재가 뒤섞여있다

 

  더 이상 떠오르지 않아 얼굴은

  다시 시작되는 폭풍인지 이렇게 시작되는 빈 들판인지

  없는 뺨을 할퀴며

 

  내가 쓴 글을 네가 고쳐 읽는다

   -전문(p. 169-170)// 『다층』 2018-가을(79)호 수록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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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다층』 2023-겨울(100)호 <다층, 지령 100호 특집 -100> 에서

  * 고주희/ 2015『시와표현』으로 등단, 시집『우리가 견딘 모든 것들이 사랑이라면』『시골시인-J』(공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