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양항로北洋航路 외 1편
오세영
엄동설한,
벽난로에 불을 지피다 문득
극지를 항해하는
밤바다의 선박을 생각한다.
연료는 이미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했지만
나는
화실火室에서 석탄을 태우는
이 배의 일개 늙은 화부火夫.
낡은 증기선 한 척을 끌고
막막한 증기선 한 척을 끌고
막막한 시간의 파도를 거슬러
예까지 왔다.
밖은 눈보라.
아직 실내는 온기를 잃지 않았지만
출항의 설렘은 이미 가신 지 오래,
목적지 미상,
항로는 이탈,
믿을 건 오직 북극성, 십자성,
벽에 매달린 십자가 아래서
어긋난 해도海圖 한 장을 손에 들고
난로의 불빛에 비춰보는 눈은 어두운데
가느다란 흰 연기를 화통火筒으로 내어 뿜으며
북양항로,
얼어붙은 밤바다를 표류하는,
삶은
흔들리는 오두막 한 채.
-전문(p. 3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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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운 등불 아래서
한겨울 밤
정갈한 백지 한 장을 앞에 두고 홀로
네게 편지를 쓴다.
그러나
바람이 문풍지를 울리자
터벅터벅 사막을 건너던 낙타의 고삐 줄이
한순간 뚝 끊어져버리듯
밤바다를 건너던 돛배의 키가 불현듯 꺾여지듯
무심결에
툭,
부러지는 연필심.
그 몽당연필 하나를 들고
흔들리는 등불 앞에서 내 마음
아득하여라.
내 마음 막막하여라.*
-전문(p. 40)
* 최치원崔致遠의 시「추야우중秋夜雨中」 한 구절, "창 밖에는 한밤중 비내리는데/ 등불 앞에 내 마음 아득하여라窓外三更雨/燈前萬里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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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간문학』 2023-11월(657)호 <이 시대 창작의 산실/ 대표작> 중에서
* 오세영/ 1942년 전남 영광 출생, 전남의 장성과 광주, 전북의 전주에서 성장.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국문학과 졸업. 1965~68년 박목월에 의해 『현대문학』추천으로 등단, 『사랑의 저쪽』『바람의 그림자』『마른 하늘에서 치는 박수 소리』등 시집 27권과 『시론』『한국현대시 분석적 읽기』등 학술서적 및 산문집 24권이 있음. 시집『밤하늘의 바둑판』영역본은 미국의 비평지 Chicago Review of Books에 의해 2016년도 전 미국 최고시집(Best Poetry Books) 12권에 선정되었음. 영어, 불어, 독일어, 스페인어, 체코어, 러시아어, 중국어, 일본어 등으로 번역된 시집이 있음. 서울대학교인문대학교수 역임. 한국시인협회장을 지냈으며 현재 서울대학교 명예교수, 예술원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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