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미의 암실
함기석
활짝 핀 살구나무 가지에 노인이 목을 맸다
나는 하모니카를 불었다
노인의 귀에서 흘러나온 이상한 달빛에
우리 집은 빙산처럼 불타오르며 무너졌다
나는 하모니카를 불었다
밤마다 어머니는 맨드라미처럼 우셨다
누이는 연못의 물 위에 보름달을 그렸다
칼로 잘라 반쪽은 밤하늘에 걸어 놓고
반쪽은 아파하는 내 눈 속에 넣어 주었다
봄밤 내내 나팔꽃 속에서
아름다운 하모니카 소리가 강물처럼 흘러나왔다
그 까아만 소리들의 상처부위를 소금으로 씻어
어머니는 아픈 밥을 안치고
누이는 살구나무 늑골 속에 해를 묻었다
처참하게 타죽은 어린 꽃들의 영혼을 묻고
젖은 내 눈동자를 묻고
구름과 함께 연못 속 달의 뒤편으로 걸어갔다
어린 해바라기가 다가와 내 눈물을 씻어 주었다
노인의 생처럼 살구꽃이 지고 있었다
살구꽃 향기에 취한 시퍼런 작두 하나가
연못가를 서성이며 저 홀로 달빛을 썰고 있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연목이 울었다 살구나무가 울었다
나는 하모니카를 불었다
날마다 새들이 나비들이 벌들이 찾아와
거미야! 우리 들판으로 놀러 가자, 속삭여도
나는 캄캄한 하모니카만 불었다
밤마다 내 꿈의 마당엔
노인의 흰 옷자락이 사납게 펄럭였고 작두가
나의 손가락 세 개를 순식간에 잘라버렸다
피를
뚝
뚝
뚝
엄마! 울부짖으며
손가락들이 무섭게 마당을 뛰어다녔다
-전문(p. 23)// 『다층』 1999년 가을(3)호 수록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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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층』 2023-겨울(100)호 <다층, 지령 100호 특집 시-100> 에서
* 함기석/ 1992년『작가세계』로 등단, 시집『디자인하우스 센텐스』『국어선생은 달팽이』『오렌지 기하학』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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