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전부는 밖에 있어서
정진혁
처음 이 가방은 다른 가방과 똑같은 표정을 가졌다 오랜 시간이 지나면서 얼룩이 생기고 때가 타고 색도 조금 바랬다 멜빵 한쪽이 뜯어지고 자크 하나가 고장 났다 가방은 훨씬 자신만의 표정을 가진다 이 표정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이 가방에 넣은 컴퓨터와 책과 간식거리와 옷들에 가방의 영혼이 잠든다 커피를 쏟은 얼룩과 손때 묻은 책들은 가방에 자신의 존재를 반영하며 가방에 침투하고 끝내 가방으로 변신한다 모든 것은 외부로부터 온다 아무렇게나 벗어 논 가방 위로 아침의 햇살이 비칠 때 우중충하고 냄새나는 가방이 환하게 빛난다 우중충한 것은 외부로부터 오는 것들로 빛난다 몇 십 년째 이 세상을 벌고 있는 나는 있음의 눈동자를 지닌 나는 외부로부터 온 것이다 멀어지지 않는 헌신과 소유하지 않는 말투를 지닌 나는 그리고 저녁을 바라보는 자세가 영혼을 가로지르는 나는 외부로부터 온다 나무를 느끼는 마음과 곧장 가지 못하고 빙빙 도는 붉음을 지닌 나는 너를 보는 내 전부는 너라는 외부로부터 온다.
-전문-
해설> 한 문장: 현존재는 "혼자"가 존재의 다양한 고원들을 거치면서 만들어진다. 존재의 영도 상태인 "혼자"엔 주름이 없다. 그것은 단일 지층으로 이루어진 순수한 고원이다. 그러나 상징계에서 존재의 영도 상태는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의 영도는 오로지 존재가 죽는 순간에만 다시 성취된다. 존재가 상징계로 진입하는 순간부터 존재는 쏟아지는 기표들을 뚫고 나가며 현존재가 되어간다. 존재의 영도에서 출발하여 존재가 기표의 은하계를 치받고 나갈 때 존재가 만나는 모든 것은 타자들이다. 그 타자들이 존재에게 다가와 "자신의 존재를 반영하며" "침투하고" 끝내 존재로 "변신한다". 그러므로 존재의 "전부"는 "외부로부터 온다". "내 전부"는 '내' 밖의 것들이 '내'게로 와서 '나'에게 새겨 놓은 흔적이고 주름이며 그림자이다. (p. 시 43/ 론126) (오민석/ 시인 ·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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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집 『드디어 혼자가 왔다』 에서/ 2023. 12. 15. <파란> 펴냄
* 정진혁/ 충북 청주 출생, 2008년 『내일을 여는 작가』로 등단, 시집 『간잽이』『자주 먼 것이 내게 올 때가 있다』사랑이고 이름이고 저녁인』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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