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에서 읽은 시

말의 무게 외 1편/ 이심훈

검지 정숙자 2023. 12. 19. 02:24

 

    말의 무게 외 1편

 

     이심훈

 

 

  말을 많이 한 날은

  소태 씹은 듯 입이 쓰겁다.

  입술보다 먼저 마음이 나서서

  온갖 너스레 떨었음을 몸이 안다.

 

  겁 많은 개가 먼저 짖어댄다.

  입가에 게거품 괴도록 앙살 부리며

  사납게 짖어댄 개일수록 꼬리 사려

  마루 밑 구석 찾아 제 발을 핥는다.

 

  돼지두루치기 먹다가 깜짝 놀랐다.

  부드럽게 양념으로 버무린 살코기

  이가 시큰하도록 씹히는 오도독뼈

  생각 없이 내뱉은 무수한 말들에도

  혓바늘만 하게 돋은 어감의 차이로

  세월 마디에 뼛조각들 섞여 있겠다.

 

  씨앗과 말은 퍼지는 습성이 있다.

  푸새들 씨앗은 익어 제풀에 퍼지고

  사람들 말씨는 설익은 제멋으로 퍼져

  선인장 가시로 어딘가 박혀 들쑤신다.

 

  고작 100g 남짓 손전화를

  내려놓은 주머니가 가볍다.

  온종일 주고받은 말의 무게를

  어림짐작으로 가늠하기 어렵다.

      -전문(p. 122-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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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뿌리의 길

 

 

  뿌리가 지나간 길 예사롭지 않다.

  태풍비 험악스레 훑고 지나간 숲

  산책로 오솔길 우묵한 도랑 패이고

  황토 섭슬린 자리 알몸 드러난 뿌리

 

  가로질러 간 허공 날줄 씨줄로 얽어

  산 부둥켜안고 버틴 뿌리의 알몸이다.

  반쯤은 쓰러진 어깻죽지 서로 기대고

  가지 부러진 허구리 옹이 박히는 나목

  발목쟁이 새순 말어 올리는 뿌리의 길

 

  척박한 돌투성이 석비레 땅

  불그죽죽한 틈바구니 헤집은 생장점

  울퉁불퉁해진 근육과 힘줄의 몸부딤*

  옹동그려 잡은 뿌리가 산의 힘이다.

 

  이달에 든 1922년 임술생 아버지

  내달에 든 1924년 갑자생 어머니

  기일이나 되어야 일껏 불 쓰는 집

 

  강제징용 피해 모시밭에 숨어지냈던

  전쟁 땐 대숲 굴에 먹거리 날라주던

  지난한 세월 틈바구니 오롯이 뻗어

  음복 술잔에 얽히고설킨 뿌리의 길

 

  제삿날이면 동내 개들도 철질 내음에 콧바람 들었다 제사상을 봐오고 부정 탈까 목욕재계할 때까지 애들도 들떴다 일가들이 모여 생선은 꼬챙이에 뀌어서 굽고 떡은 절구통에 찧어서 만들고 닭 잡고 돼지고기 삶고 전 부치고 느리미 지지고 나물 무치고 식혜 과일 준비하면서 젯메쌀로 정갈히 두었다가 메밥을 지을 때 새 발자국 남으면 조상이 새가 되었다며 유심히 보기도 했다 삼경이 넘어서야 제사 모시고 첫닭 우는 새벽쯤에 제사상을 치웠다 부잣집 제삿날에 바구니를 마루에 놓고 단자요 외치고 나오면 제사음식을 골고루 담아서 내놓는 단자 음식 나누던 시절이 먼 옛날도 아닌데

 

  누구는 먹고살기 바빠 못 오고

  누구는 생각이 달라 참석 안 하고

  첨작은 고사하고 석 잔 술 올릴

  후손 모이기도 버거워지는 초저녁

 

  해마다 마당가에 제멋대로 자란

  분꽃들 날 저물어 단장하고 웃네.

  저절로 군락 이룬 달맞이꽃들만

  모이마당에 흐르러지게 피었겠네.

      -전문(p. 12-14) 

 

     * '몸부림'의 사투리

 

    ※ 블로그 註: 위 시에서의 맞춤법과 띄어쓰기는 원문에 따랐음을 알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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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집 『뿌리의 행방』 에서/ 2023. 11. 15. <한국문연> 펴냄

  * 이심훈/ 충남 부여 출생, 2003『시사사』로 등단, 시집『못 뺸 자리』『안녕한가 풀들은 드러눕고 다시 일어나서』『시간의 초상』『장항선』『바람의 책력』, 시문집『느림과 기다림의 장항선 인문학 기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