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에서 읽은 시

메히아*/ 김재홍

검지 정숙자 2023. 12. 20. 00:42

 

    메히아*

 

    김재홍

 

 

  중남미의 어느 공화국 시민인 그는

  동란과 쿠데타를 딛고 선 아시아의 작은

  공화정부의 취업 비자를 받아

  뜨끈뜨끈한 잠실 야구장 타석에 섰다

  (왜 중남미 선수들은 교범에도 없는 말타기 자세를 하는지 몰라)

 

  메시아가 어디 사는지도 모르면서

  검게 붉게 얽은 얼굴을 하고 그는 처음에

  야구공과 방망이를 손난로처럼 품고

  한겨울 국제공항 청사를 두리번거리며 어슬렁거리며 나왔을 것이다

  (머리통이 얼마나 작으면 헬멧 속에 모자를 또 썼을까)

 

  그는 당당하게 2루타를 쳤다

  베이스를 밟고 선 두 다리가 덜덜 떨렸다

  수천 개 눈동자가 일순간 그의 몸을 향해

  함성을 지르고 파도처럼 술렁거리며 비명을 지르고

  거대한 솥단지가 되어 펄펄 끓다가

  더 작은 체구의 다음 타자가 안타를 칠 수 있을지 의심한다

  (광중석에 앉으면 왜 선수들은 모두 야구공처럼 보일까)

 

  비쩍 마른 붉은 눈의 게바라를 읽고 싶었다

  국경을 뛰어넘는 공화국의 깃발을 보고 싶었지만

  그는 너무 작았고 액정 화면에 잡힌 그의 헬멧에는

  국적 불명의 독수리 이니셜만 코를 벌름거리며 박혀 있었다

 

  멕시코와 푸에르토리코와 쿠바 출신의 운수 좋은 메이저리거들도

  타석에 서면 구부정하게 허리 굽히고

  꼭 말 타는 자세로 방망이를 든다

     -전문-

 

   * 메히아: 국내 프로야구 팀 '한화 이글스'의 외국인 선수(2003년)

 

  해설> 한 문장: 이 작품에 이르면 김재홍이 얼마나 '야구'라는 장에 서서 인생의 축도縮圖를 응시하고 기록하는 시인인지를 여실하게 알 수 있다. "메히아"라는 실명實名의 야구 선수는 "중남미의 어느 공화국 시민"이었지만 지금은 "동란과 쿠데타를 딛고 선 아시아"의 작은 나라에 와 있다. 그는 '메시아'(그의 이름이 '메시아'라는 기표를 환기했을 것이다.)의 존재도 모르면서 "야구공과 방망이를 손난로처럼 품고" 메시아를 대망하듯 이 작은 나라를 찾아왔다. 그런데 그는 당당히 "2루타"를 치고도 덜덜 떠는 약한 모습을 가진 존재이다. 그는 그저 "붉은 눈의 게바라"를 읽고 싶었고 "국경을 뛰어넘는 공화국의 깃발"을 보고 싶어 했던 청년이었지만, 지금은 커다란 운동장에서 "국적 불명의 독수리 이니셜"(그의 팀이 '한화 이글스'였으니!)이 새겨진 헬멧을 쓰고 군중들의 함성 속에서 한없이 작아지고만 있을 뿐이다. 그 점에서 그는 '테드 윌리엄스'와는 전혀 다른 존재이다.

  이 시편에 몇 차례 사용되고 있는 괄호 속의 진술들은 그것대로 일종의 계열체를 형성하면서 '메히아'에 대해 유머와 연민을 동시에 발생시킨다. 그의 타격 자세가 "교범에도 없는 말타기 자세"라고 한다든지, "머리통이 얼마나 작으면 헬멧 속에 모자를 또 썼을까"라면서 그의 외관을 희화화한다든지, 멀리서 "관중석에 앉으면 왜 선수들은 모두 야구공처럼 보일까"라고 말하는 등의 연쇄가 이러한 유머와 연민의 동시적 결속을 꾀하게 한다. 그러니 야심만만하게 '손난로'를 품고 이 작은 나라에까지 온 중남미의 한 '야구 영웅'은 일종의 '반영웅(反英雄, antihero)'이 되어, 화자로 하여금 짙은 비애와 연민의 페이소스를 머금게 하는 것이다. 그 비애와 연민이 격렬한 감정 과잉으로 나타나지 않고 철저하게 배면으로 숨어드는 형식으로 진술되고 있는 것이 김재홍 어법의 독특한 특징임은 여러 차례 강조한 바이다. (p. 시 15-16/ 론 127-128) (유성호/ 문학평론가 · 한양대 교수)

 

   ---------------------

  * 시집 『메히아』 에서/ 초판 1쇄 2009. 3. 110/ 개정판 1쇄 2023. 3. 31. <시작> 펴냄

  * 김재홍/ 1968년 강원 삼척 출생, 2003⟪중앙일보⟫에 시 「메히아」가 2022년 ⟪광남일보⟫에 평론이 각각 당선되어 작품 활동 시작, 시집 『메히아』『다큐멘터리의 눈』『주름, 펼치는』『돼지촌의 당당한 돼지가 되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