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티가 생각나지 않는다
최휘
내가 한때 사랑했던 그것이 언제부터인가 생각나지 않는다 분명 내가 애지중지하며 안고 뒹굴던 것이었다 그 얼굴 그 표정 그 손짓 그런 것들이 다 아리송하다
분명한 건 분홍색 헬로 키티는 아니라는 것 키티가 키티를 밀어 올리는 아침 나는 정체 모를 키티에 정신이 팔린다 컴퓨터 책장 유리창 너머 화장실까지 돌아다녀도 키티가 생각나지 않는다
키티는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어디에 숨었을까 이불 베개 침대 모서리 귤껍질까지 들추며 키티를 찾아본다 이상스레 입술에 착 달라붙는 키티 이름만 둥둥 떠다니는 키티 그러나 키티는 보이지 않는다
키티는 고유명사인가 키티는 무엇인가 키티는 힌트를 주지 않는다 숨 죽인 키티 지워진 키티 그런 느낌뿐 키티가 사라졌다
너무 덥다 히터를 껴안은 것 같은 바람이 분다 키티를 찾는 내 몸의 관절마다 주삿바늘을 꽂아 놓은 것 같다 키티인가 긴 링거줄을 따라가 보니 사방 숲이 불타고 있다 키티가 불을 지르고 있나 구름이 붉어지고 나는 메마른다
그래도 키티가 생각나지 않는다 우산을 들춰 봐도 모자를 들춰 봐도 부채를 펴 봐도 키티는 없다 뜨거운 애인처럼 태양을 머리에 이고 눈을 찌푸린 채 나는 키티를 생각한다
키틱 키틴 키틸 키팀 키팃 키팅 젖은 눈으로 어딘가를 서성이는 것도 같은 오색 날개를 펴고 어디론가 날아간 것도 같은 키티가 도대체 왜 생각나지 않는 걸까
-전문-
해설> 한 문장: 화자가 기억해 내려고 애쓰는 대상은 키티라는 인형의 모양이나 이름, 즉 '핵심'이 아니라 키티에 대한 화자의 내밀한 '심정'이다. 즉 화자가 "안고 뒹굴던" 키티의 냄새와 촉감, "그 얼굴 그 표정 그 손짓", 그리고 거기에 달라붙은 감정과 정서와 알 수 없는 느낌의 총체이다. "이상스레 입술에 착 달라붙는" 그것은 화자와 분리 불가능한 생명체로서 스스로 주체가 되는 이야기 그 자체이다. 이야기는 화자의 몸 안에 있지만, 분명하게 기억나지 않기에 아직은 제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것이다. 키티에 대한 느낌의 풍부함과 모호함은 키티를 찾겠다는 욕망을 부추긴다. 욕망하는 대상이 무엇인지 분명하지 않아서 욕망의 힘은 더 세진다. 생각나지 않는 키티를 찾는 과정이 곧 이야기의 길이다. 즉 이야기가 주체가 되어 나아가는 과정이다. 키티를 시니피앙, 키티의 기억을 시니피에라고 한다면, 시니피앙이 지시하는 내용, 즉 시니피에는 알 수 없으나 곧 드러날 것만 같아서 시니피앙의 운동은 더욱 활발해진다. 키티 찾기는 시니피앙의 놀이라고 할 수 있다. 왜 이야기가 끌어당기는지 모르면서도 화자는 이야기에 끌린다. 이 욕망 때문에 이야기는 계속 나아갈 힘이 생긴다.
키티가 생각나지 않는다는 것은 먹고사는 일, 일상의 여러 일에 얽매인 성인 화자가 어린 시절의 여러 경험, 그 경험과 융합된 감정, 감각, 분위기, 행복감 등과 멀어져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내 몸의 관절마다 주삿바늘을 꽂아 놓은 것 같다 키티인가 긴 링거줄을 따라가 보니 사방 숲이 불타고 있다 키티가 불을 지르고 있나 구름이 붉어지고 나는 메마른다"는 육체적 · 심리적 증상은 어린 시절과 멀어짐으로써 생긴 구체적인 결핍의 이미지이다. 화자는 키티의 기억을 찾기만 하면 유년 시절이 회복되고 결핍이 충족될 것 같은 기분이 들지 모른다. 키티의 기억을 찾아 헤매는 것은 시니피앙이 계속 운동하게 하는 추동력이다. 시니피에는 시니피앙이 이야기를 전개할 수 있도록 자극하면서 계속 미끄러지고 숨는다. 그래서 화자는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자가 아니라 스스로 제 길을 찾아 나아가는 시니피앙의 운동을 보는 자이며, 그 시니피앙 속에 숨어 있는 시니피에를 찾는 자이다. (p. 시 18-19/ 론 125-127) (김기택/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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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집 『난, 여름』 에서/ 2023. 10. 23. <시인의일요일> 펴냄
* 최휘/ 경기 이천 장호원 출생, 2012년 『시로여는세상』으로 등단, 시집 『야비해지거나 쓸모없어지거나』, 동시집『여름 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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