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에서 읽은 시

손쉬운 바다 외 1편/ 고명자

검지 정숙자 2023. 12. 14. 01:54

 

    손쉬운 바다 외 1편

 

    고명자

 

 

  바다 보러 간다

  집 앞이 수평선 전철역

  바다 없는 지역 사람은 어디에서 연애를 하나

  술을 또 어디로 가서 퍼마시나

  울고불고 싶을 땐 어디에 숨어 고래감 치며 우나

  파도를 붙잡고 엎어치기 메치기 하는 저 애들 수작을 봐봐

 

  바다의 시간은 잴 수 없어

  수십 년 된 근심에 싸인 얼굴이라고 

  오랜만에 만난 사람이 이물질인 듯 떼어 주려 했으나

  떠밀려 온 미역 줄기를 주워 내려는 듯 손을 뻗었으나

  그 앞에서 슬쩍 얼굴을 치웠다

  

  오늘 바다는 유리 한 장 눌러 놓은 것 같다

  아무 짓도 하지 않았는데 삼십 미터 파도가 나를 덮쳐

  순전히 바다의 일이라 떠넘겨도 되는

  오늘 같은 아무렴

  쓴물 올라오는 속병도 고칠 수 있으려나

  손바닥 한가득 바다를 퍼 올린다

 

  모래 한 알을 위해 물결도 애쓴다

  고등어 갈치 병어 새끼 받아다 난전을 펼쳐 볼까

  다 늙은 행색으로 방파제에 앉아

  뜨개바늘로 가자미 코를 걸어 요리조리 팔아 볼까

  궁리 밖으로 슬쩍 발을 내밀어 보는데

  오늘 바다,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한다

     -전문(p. 68-69)

 

 

    ---------------------------

    나무 되기 연습

 

 

  주먹다짐 아닌 주먹으로 인사 나눈다는 말은

  인디언 부족에게서 흘러나온 말

 

  지구를 휩쓰는 대유행은

  오동잎사귀 뜯어 마스크 만들기

  빗소리를 꿰어 바느질하기

  올여름 빗줄기는 너무 거칠어

  바늘구멍으로 들어가질 않아 애를 먹었네

 

  초저녁이면 나무 유령이 어슬렁거린다는 소문

  동네방네 내 손 놰놔 내 다리 내놔라

  어둡기 전 문 잠그고 입을 봉하고 들어앉아야 하는

  재채기 한 방이면 끝장이라는 전법에

  몸에 밴 침묵으로 살아남는 전술

  혹시, 거꾸로 돌고 돌겠다는 지구의 전언일지 모르겠네

 

  주먹에서 힘을 빼야 하는 시간이네

  열대우림 수십만 평 베어지는 오늘의 뉴스

  나에게도 미안한 얼굴이 있어야 하네

  쉿,

  풀잎 한 장도 다치지 말아야 사랑이네

 

  내년 봄에는 기필코 휘파람새 딱새들의 나무를 되돌려줄 것이네

     -전문(p. 70-71)

 

  --------------------

  * 시집 『나무 되기 연습』에서/  2023. 12. 5. <걷는사람> 펴냄  

  * 고명자/ 2005년 『시와정신』으로 등단, 시집 『술병들의 묘지』 『그 밖은 참, 심심한 봄날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