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쉬운 바다 외 1편
고명자
바다 보러 간다
집 앞이 수평선 전철역
바다 없는 지역 사람은 어디에서 연애를 하나
술을 또 어디로 가서 퍼마시나
울고불고 싶을 땐 어디에 숨어 고래감 치며 우나
파도를 붙잡고 엎어치기 메치기 하는 저 애들 수작을 봐봐
바다의 시간은 잴 수 없어
수십 년 된 근심에 싸인 얼굴이라고
오랜만에 만난 사람이 이물질인 듯 떼어 주려 했으나
떠밀려 온 미역 줄기를 주워 내려는 듯 손을 뻗었으나
그 앞에서 슬쩍 얼굴을 치웠다
오늘 바다는 유리 한 장 눌러 놓은 것 같다
아무 짓도 하지 않았는데 삼십 미터 파도가 나를 덮쳐
순전히 바다의 일이라 떠넘겨도 되는
오늘 같은 아무렴
쓴물 올라오는 속병도 고칠 수 있으려나
손바닥 한가득 바다를 퍼 올린다
모래 한 알을 위해 물결도 애쓴다
고등어 갈치 병어 새끼 받아다 난전을 펼쳐 볼까
다 늙은 행색으로 방파제에 앉아
뜨개바늘로 가자미 코를 걸어 요리조리 팔아 볼까
궁리 밖으로 슬쩍 발을 내밀어 보는데
오늘 바다,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한다
-전문(p. 68-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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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되기 연습
주먹다짐 아닌 주먹으로 인사 나눈다는 말은
인디언 부족에게서 흘러나온 말
지구를 휩쓰는 대유행은
오동잎사귀 뜯어 마스크 만들기
빗소리를 꿰어 바느질하기
올여름 빗줄기는 너무 거칠어
바늘구멍으로 들어가질 않아 애를 먹었네
초저녁이면 나무 유령이 어슬렁거린다는 소문
동네방네 내 손 놰놔 내 다리 내놔라
어둡기 전 문 잠그고 입을 봉하고 들어앉아야 하는
재채기 한 방이면 끝장이라는 전법에
몸에 밴 침묵으로 살아남는 전술
혹시, 거꾸로 돌고 돌겠다는 지구의 전언일지 모르겠네
주먹에서 힘을 빼야 하는 시간이네
열대우림 수십만 평 베어지는 오늘의 뉴스
나에게도 미안한 얼굴이 있어야 하네
쉿,
풀잎 한 장도 다치지 말아야 사랑이네
내년 봄에는 기필코 휘파람새 딱새들의 나무를 되돌려줄 것이네
-전문(p. 70-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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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집 『나무 되기 연습』에서/ 2023. 12. 5. <걷는사람> 펴냄
* 고명자/ 2005년 『시와정신』으로 등단, 시집 『술병들의 묘지』 『그 밖은 참, 심심한 봄날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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