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고 푸른 날들 외 2편
황강록
"이봐요, 귀여운 짐승! 이제는 잠을 깨요."
늦은 아침 넌 내게 그렇게 말했었지. 내 털들을 간질이던 차가운 공기, 눈꺼풀에 빛 무늬를 만들던 햇살로, 넌 그렇게 날 찾아왔었어. 난 어린아이처럼 웃으며 창문으로 걸어 들어오는 너의 하얗고 긴 자취를 만났지. 너는 춤추듯 가볍게 내 방안을 걷고, 난 절반쯤 허공에 뜬 채, 밤의 먼지에 덮여 있던 책과 의자와 악기들이 웃는 것을 보았어. 사물들의 웃음, 그것들은 네 손끝이 닿을 때마다 그냥 거기 있다는 무관심으로부터 벗어나 반짝거리기 시작했지. 네 머리카락의 물방울들은 내 어지럽던 밤의 꿈들을 씻어 내리고, 함부로 내딛는 두 다리는 놀이를 하고 싶은 꼬마의 충동 같았어. 넌 나와 사랑이라는 말도, 느낌도 없이 그토록 천진하게 사랑했었지.
난 네가 누군지 몰랐어.
너는 햇살이었고, 바람이었고, 즐거운 충동이었지
너는 가루 같은 물방울이었고, 춤이었고, 맑고 높은 웃음소리
항상 내게 최초의 아침이었어.
-전문(p. 96-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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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 이제 조용히 숲으로 걸어 들어가시나
가슴의 적막함을 굳이 펼치고 싶었다면
시보다는 새의 울음이
새의 울음보다는 큰 나무의 그림자가
큰 나무의 그림자보다는 깊이를 알 수 없는 물의 푸름이 더 낫지 않았을까··· 혼자 생각해 본다.
그대 그 모든 이야기를 노래하려고 했었나?
그 구구절절함은 어디로 흘러 들어갔으며
똬리를 틀어 수많은 겨울을 잠으로 굳힌 후에
비로소 어디인지 알 수 없는 초원에 알 수 없는 어린 꽃으로
노래 한 송이를 피워낼 수 있었을까
그렇다면 그걸 슬픔이라고도
그리움이라고도 말할 수 있지 않았을까.
그대의 뒷모습이 돌고 돌아
내 뒤의 어둠이 되고
깊은 밤 알 수 없는 귀신으로 잠시 찾아오기도 하지만
그 흔적들의 번잡함을 홀로 치우며
걸레를 들고 훔치고 또 훔쳤던 것은
부끄러움이었을지, 홀로 흘린 핏방울이었는지 모르고, 내 슬픈 살육의 흔적이었는지 모른다. 누군가는 그걸 작품이라고 전시하기도 한다고 하지만, 그대···
떠나는 건가. 아니면 다시 돌아오는가.
아니 간 적도 돌아온 적도 없었던 건가. 이 크고 깊은 적막함을 굳이 칭얼대듯 노래
불렀어야 했나. 꼭 그대였어야 했나. 우린 사람이었고, 만났었던 것이 맞나, 친구였다고 해야 하나··· 아니면 지나고 생각해보니
명백히 이것을 사랑이라고도 할 수 있지 않은가. 생각
한다. 그대, 농담하듯이, 노래하듯이, 혼자 빈 초원에서 춤사위를 펼치듯이, 누워서 하늘을
바라보듯이, 멀리 떠나가듯이, 다만 그러하듯이
-전문(p. 114-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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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타래
여기에 실타래가 몇 개 있다.
피곤할 때면 마구 꼬여 엉망인 그 무더기들에 화를 내고
자고 일어나면 적당히 복잡한 그 과제들이 의욕을 부린다.
늘어날 때도 있고 줄어들 때도 있지만
새로 생겨나고 없어지기도 하지만
대충
항상 그만그만하게
있다.
새로 엉켜져 가는 것
거의 다 풀려 가는 것
······
-전문(p. 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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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집 『조울』 에서/ 2023. 9. 25. <한국문연> 펴냄
* 황강록/ 1969년 서울 출생, 2000년 『현대시』로 등단, 시집 『지옥에서 뛰어놀다』『벤야민 스쿨』, 연극 · 영화 · 뮤지컬 · 방송 · 음반 등의 작곡가 또는 음악감독으로 활동해 왔고, 1999년 서울국제연극제무대예술상 수상했으며, 2002년부터 명상수련을 하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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