꾸러미를 내려놓고 외 1편
배세복
꾸러미를 내려놓았다
슬그머니 놓았는데도
방바닥이 제법 울렸다
벌써 저녁상 주위로
모두 둘러앉아 있었다
고갤 돌려 그가 물었다
병은 제대로 답하지 못했다
계집애로 생겨났어야 하는 놈이
사내로 태어나서 고생이다
병이 우물거릴 때마다
자주 듣던 말이 쏟아졌다
숟가락질을 멈추고
그가 급히 다가왔다
시로 가득 찬 문집이었다
법대를 가야지 글을 쓴다고,
내가 그렇게 당하는 걸 보고도?
굶어 죽기 딱 좋은 놈들이
시 쓰는 놈들이라고
그가 한껏 소릴 높였다
아무렇게나 책장을 넘기다가
입을 동그랗게 말면서
어떤 단어를 거칠게 되뇌었다
병이 시를 써서 가져갈 적마다
어깨를 두드려 주던
지도교사의 이름이었다
-전문(p. 84-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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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표가 있었고
안개주의보 속에 이정표가 서 있고
길 끝에 그가 있다는 표식이다
병은 눈두덩을 부벼댔으나
발끝은 돌부리를 지나치지 못했다
어떠한 사실을 잊을까 봐
손바닥에 글씨를 쓰던 시절이 있었다
어린 병이 놀고 있다
짚단을 쌓아논 볏누리를 헤집고
그가 고함을 질렀다
쥐새끼처럼 숨어서 놀지 말랬지
사금파리가 풀잎과 함께 흩어졌다
어떤 조각은 얼굴을 때렸다
그 밤 병의 손바닥에는
여러 글씨가 적혔다가 지워졌다
안개비가 어느새 는개 되었다
그는 어떤 단어일까
병은 비척이며 일어섰다
길바닥에 흩어져 있는 뜻씨들을
바지 주머니에 모두 담았다
무겁고 차가웠다
어느새 눈꺼풀에 는개가 맺혀
눈을 깜박일 때마다 흘러내렸다
가볍고 따뜻한 뜻씨들을 채워 보았지만
저쯤에서 두고 온 아이가 고개를 저었다
아직도 볏누리 속에 갇혀 있었다
빗낱은 조금씩 굵어져
는개가 가랑비 되었다
병은 그에게 다가가지 못하고
길바닥 한가운데서 자꾸 미끄러졌다
빗밑이 가벼울 거라는 예보처럼
처음부터 모두 오보였다
-전문(p. 124-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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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회 선경작가상 수상시집 『두고 온 아이』 에서/ 2023. 11. 27. <상상인> 펴냄
* 배세복/ 2014년 ⟪광주일보⟫신춘문예 당선, 시집『몬드리안의 담요』『목화밭 목화밭』, <문학동인 Volume>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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